사회 사회일반

[시각] '하얀 맨발' 그리고 '빨간 바지의 마법'

김경훈 디지털미디어부 차장

김경훈 디지털미디어부 차장



외환위기로 나라의 앞날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지난 1998년 7월. 그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에 갓 데뷔한 스무 살의 골퍼 박세리는 메이저대회인 US 여자오픈에서 시름에 빠진 국민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선물했다.

해저드 바로 옆에 떨어진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물에 뛰어든 맨발 투혼. 구릿빛 장딴지 밑으로 드러난 하얀 발은 눈부셨다. 그는 끝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국민들은 감격했다.


희망의 힘은 무척이나 강했다. 국민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었다. 가수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를 배경으로 거듭 방송을 탄 ‘맨발 샷’ 장면은 “가망이 없다”며 절망한 많은 이에게 위기 탈출의 용기를 부여했다.

미국에서, 그것도 골프로 우뚝 선 그의 모습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배짱을 심어줬다. 또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승부 할 게 많다는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줬다.


“모든 사람이 나를 한국 여자골프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선구자는 정말 힘들고 압박감도 심합니다. 그러나 내 뒤를 따르는 많은 후배에게 올바른 길, 최선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고 그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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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13일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감동적인 연설을 남긴 박세리는 아시아 최초, 당시 현역 골퍼로는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박세리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박세리 키즈’가 세계 여자골프 무대를 누비고 있다. 한 해 30여개의 LPGA 투어대회 중 절반 이상을 한국과 한국계가 우승하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됐고 지난달에는 통산 200승을 넘어섰다. 올해도 19개 대회에서 7승을 거두며 변함없이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지만 최근 연이어 들려온 우승 소식은 여느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박성현은 이달 2일 미국 일리노이주 킬디어의 켐퍼 레이크스 골프클럽에서 끝난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치열한 연장 승부 끝에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한 주 뒤 김세영은 미국 위스콘신주 오나이다의 손베리 크리크 앳 오나이다 골프장에서 열린 ‘손베리 크리크 클래식’에서 투어 사상 72홀 역대 최저타와 최다 언더파 신기록으로 우승컵에 입을 맞췄다.

부진을 한 방에 날려버린 박성현의 환상적인 ‘로브샷(lob shot)’과 앞으로 과연 깨질까 싶은 김세영의 대기록에 찬사가 쏟아진다. 하지만 이들의 우승이 더욱 특별하게 와닿는 건 고되고 힘든 지금 우리의 상황과 극적인 승리의 맞물림이 20년 전 그때와 너무나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기업은 활력을 잃었고 열심히 돈 벌고 뛰고 싶은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 보면 우울한 경제지표는 끝이 없고 서민들의 한숨은 깊다.

‘하면 된다,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 박성현의 좌우명에 담긴 의지가, 새로운 역사를 쓴 김세영의 ‘빨간 바지 마법’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세리의 ‘하얀 맨발’이 그랬던 것처럼.
styxx@sedaily.com

김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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