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의 비판론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대통령의 유럽방문에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는다.
트럼프는 자신이 혼자 힘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라는 기적적인 일을 성사시켰다고 말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국들 사이에 불신과 불협화음의 씨를 뿌림으로써 혼자 힘으로 서방 동맹(western alliance)을 망가뜨렸다고 비난한다.
두 가지 주장 모두 사실이 아니다. 트럼프의 나토 방위비 증액 요청은 과거에도 미국 행정부가 일관되게 요구해온 사안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역시 거의 일상적으로 나토 우방국들에 동일한 요구를 한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 초대 국방장관인 로버트 게이츠는 사임하기 몇 주 전 유럽에서 행한 고별연설에서 바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고별사에서 “미국을 구성하는 조직화한 시민집단들은 자주국방을 등한시하거나… 독자적인 방어능력을 갖춘 동맹국들을 대신해 감소세를 보이는 귀중한 국가 자원을 사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격형성기에 냉전을 경험하지 못한 미래의 미국 정치 지도자들은 나토에 대한 미국의 투자이익이 투입된 경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 “독일이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며 베를린을 정조준한 트럼프의 요란스러운 공격은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
독일은 전략적 위험성을 지닌 러시아와 에너지 협정에 기꺼이 서명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잘못 꿰고 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대량 수입하는 독일이 에너지를 볼모로 잡은 러시아의 협박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니다. 러시아 역시 천연가스 대금으로 독일이 제공하는 막대한 현금에 점점 더 깊숙이 의존하게 된다. 결국 어느 한쪽이 칼자루를 쥐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상호의존적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진짜 문제는 러시아가 현재 건설 중인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이용해 동유럽 국가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과거에도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에너지 공급을 유보하거나 가격을 올리는 등 천연가스를 압박수단으로 활용한 바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트럼프가 독일을 향해 던진 불만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제기됐었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듯이 이번에도 트럼프의 조잡하고 공격적인 접근법이 성과를 낼 것이라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유럽 측의 반응은 동맹국들의 거센 반발로 모인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트럼프에게 독일이 러시아 혹은 미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진정한 이념혁명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고 주역은 트럼프이며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하는 수단은 외교정책이다.
의도적이든 본능적이든 트럼프는 공화당 개조작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외국인들과의 동맹이나 협정에 대한 불신 등 고립주의라는 공화당의 역사적인 뿌리에 바짝 접근한 새로운 외교정책을 만들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는 듯 보인다.
트럼프는 각종 집회에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국을 “최악의 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국가안보와 무역 면에서 미국을 죽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나토와 유럽연합(EU)을 다루는 데 있어 미국은 얼간이 행세를 한다”고 개탄한다.
이와 관련해 뉴욕매거진의 조너선 체이트는 “트럼프가 나토를 증오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좋아하도록 자신의 지지자들을 길들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트럼프는 이 방면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다. 공화당계 유권자들의 51%는 나토 우방국들이 방위비 지출을 인상하지 않는 한 미국이 그들을 지켜줘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러시아와 푸틴에 대한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식을 뒤집어 놓았다는 점이다.
최근 열린 집회에서 트럼프는 “푸틴은 괜찮다. 우리도 그렇다. 푸틴과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역설했다.
현재 푸틴에게 호의적인 견해를 가진 공화당 유권자들의 비율은 같은 견해를 지닌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율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교류를 증진해야 한다는 견해가 전체의 56%를 차지한다.
이 정도면 공화당 스스로 그들의 이념적 가변성을 입증한 셈이다.
법과 질서를 중시해온 공화당이 지금은 연방수사국(FBI)에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 보인다. 자유무역을 외치던 공화당은 지금 견고한 보호주의의 기치 아래 민주당보다 훨씬 단단한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낙관적 이민정책을 찬양하던 공화당의 절반 이상은 국경에서 밀입국자의 자녀를 부모로부터 격리하고 모든 서류 미비 이민자들을 형사범으로 기소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트럼프의 정치적 천재성은 공화당의 지지기반에 이념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데 있다. 워싱턴과 뉴욕의 공화당 엘리트들은 여전히 레이건의 공식을 지지하지만 풀뿌리 지지자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5년 전, 공화당의 한 유력 인사는 “고립주의의 유령이 우리 당을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앞으로 고립주의 정서가 대세를 이룰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공화당은 제기된 질문에 답하고 일관성 있는 정당강령을 회복함으로써 신고립주의를 떨쳐내야 한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존 볼턴이 쓴 글이다. 지금 그는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이다.
이제 국가안보에 투철한 공화당원들마저 트럼프의 이념혁명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