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어느 여름날 오후.
텃밭에서 뽑은 잡초들을 풀숲이 우거진 곳에 버리고 내려오는데 아저씨가 손짓을 한다. 평소 인사하고 지내며 요즘처럼 더울 땐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도 대접해 드리는 분이다. 여느 때처럼 땀방울이 송송 맺힌 얼굴은 무슨 작업을 막 끝내고 온 모습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저번에 멧돼지가 내려와 고구마밭 헤집어 놨다고 했잖아. 도저히 안 되겠어. 면사무소에 가서 민원 넣었어. 멧돼지 잡아달라고.”
“멧돼지요?”
“응. 관내 등록된 포수가 2명 있는데 한 명은 지금 총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고 다른 한 명만 활동 가능하다네. 조금 전에 와서 이곳 지형 대략 확인하고 밤에 다시 온다네.”
“근데 멧돼지가 이 더운 날에도 내려와요”
“예전엔 없었는데… 발자국 난 거 보니깐 크기가 다르더라고. 새끼들도 같이 내려왔나봐”
지난 겨울에도 트랙터로 갈아놓은 듯 밭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500평 남짓한 밭을 손수 혼자 가꾸는데, 식당 하는 동생네 집에 가져다 줄 옥수수 수확을 앞두고 신경이 많이 쓰이시는 모양이다.
당연히 허가된 사냥꾼의 총으로 잡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럼 멧돼지는 어떻게 잡아요”라고 물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아저씨는 “이번 여름은 유난히 진드기가 많아 사냥개를 풀어 잡기는 힘들다”며 “포수가 밤에 밭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멧돼지가 나타나면 잡을 계획을 세웠다”고 앞산을 넌지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날 부른 목적은 혹시 밤에 총소리가 들릴지 모르니 주변 사람들한테도 이 사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모두 잠든 사이 총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당부였다.
유해 조수로 등록된 멧돼지 활동으로 요즘도 하루에 6~7건 민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겨울엔 무밭을, 여름엔 채 열리지도 않은 고구마 줄기를 먹는단다. 여름철 한창인 옥수수는 그들의 주메뉴인 셈이다.
주택과 밭 사이는 불과 10m정도 남짓. 멧돼지가 밤에 나타나 집 근처 텃밭까지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한다. 새끼들과 함께 어른 멧돼지는 지금도 뒷산 어딘가에 숨어 있다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숲속은 아무 말이 없다. 정말 포수가 사냥에 나선다면 어린 멧돼지 목숨까지 앗아 갈 것이다. 고라니도 잡아야 한다는 아저씨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무릇 생명이란, 유해동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 ‘숨’을 끊을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저씨 말씀대로 밤까지 기다렸지만, 그날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