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모바일폰 칩 메이커인 미국 퀄컴이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해 결국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 인수를 포기하기로 했다. 440억달러(약 50조원) 규모의 초대형 인수합병(M&A)이 무산된 퀄컴이 미중 무역전쟁의 최대 피해자라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미중 간 정면대결이 격화하면서 양국 기업들이 줄줄이 실적을 하향하거나 파산으로 내몰리는 등 무역전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기업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날 스티브 몰렌코프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NXP 인수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사상 최대의 기술기업 간 M&A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주목됐던 퀄컴의 NXP 인수시도는 양사 합병으로 시장이 영향을 받는 9개국 가운데 중국의 승인을 끝내 얻지 못해 물거품이 됐다. 지난 2016년 10월 인수추진 계획을 밝힌 지 2년여 만이다. 외신들은 퀄컴의 NXP 인수 무산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추가 관세부과 조치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복 성격이 짙다고 분석했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중국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쓸 것이라는 강한 신호”라며 “두 나라가 더 폭넓은 경제적 갈등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페이스북이 중국 동부 저장성에서 받은 자회사 설립 인가도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정부의 기업신용정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페이스북 자회사 설립 인가 정보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자회사에 관한 언급은 중국 매체에서 부분적으로 검열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중 무역전쟁은 양측 기업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제너럴모터스(GM)·포드·피아트크라이슬러(FCA) 등 미 ‘빅3’ 자동차 제조사들은 무역갈등의 여파로 올해 실적전망을 줄줄이 하향 조정했다. 철강·알루미늄 등 주요 원자재에 고율 관세가 붙으면서 생산비용이 증가한데다 중국이 미국산 자동차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면서 실적 눈높이를 낮춘 것이다. 전날 할리데이비슨과 월풀도 각각 관세 부과에 따른 제조비용 상승을 이유로 올 실적전망을 하향 조정한 바 있다.
중국 기업들의 피해도 현실화하고 있다. 이날 중국 관찰자망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은 대두를 수입하던 산둥성 소재 식용유 기업인 천시그룹이 최근 만기 도래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고 산둥성 지방법원에 파산 구조조정을 신청했다. 대두 수입 등 무역 비중이 60%인 천시그룹은 당국의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영향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다 미국산 대두에 대한 관세 부과까지 겹치자 경영이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기업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규모도 크게 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국 기업이 갚지 못한 채권은 165억위안(약 2조7,600억원)으로 디폴트 규모가 사상 최대였던 2016년(207억위안) 한 해의 80% 수준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전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제10차 브릭스(BRICs)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무역전쟁은 승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배격돼야 한다”며 “이 길(무역전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다치게 될 것”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경고를 날렸다.
/베이징=홍병문특파원 박홍용기자 hb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