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도란도란, 소곤소곤, 속닥속닥

작가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소중한 이들의 대화소리 그리워

가슴으로 나누는 따스한 소통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밑거름




처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던 시절, 가장 그리웠던 것은 가족들의 대화 소리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갑자기 많아지다 보니, 처음에는 그 엄청난 떠들썩함에서 놓여나 맞이하는 고독이 좋았지만 점점 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얼마나 사람의 말소리가 그리웠으면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침드라마를 틀어 놓고 배우들의 대화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논문을 쓸 정도였다. 가끔은 우리 집의 지나친 왁자지껄함에서 벗어나 정말 혼자 있고 싶은 느낌이 들곤 했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 사람은 고독과 연대감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양면적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내가 공부한답시고 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동생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어도 얇은 나무문 사이로 그 대화의 내용이 다 들리긴 했지만, 바로 그 조심스러운 대화, 나를 배려하는 대화, 그러면서도 어차피 탄로날 것이 빤한 그 투명한 말들의 멜로디가 그리웠던 것이다. ‘속닥속닥’ 내 뒷담화를 하는 엄마와 동생의 수다까지도 그리워지는 시간, 그것은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가르쳐준 대화의 소중함이었다.


왁자지껄함과 떠들썩함이 늘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서 관계의 소중함, 연대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도란도란, 소곤소곤, 속닥속닥’은 할 말을 다 하면서도 소리의 강도를 줄이는 조심스러움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들어가 있기에 더욱 소중한 의태어다. 돌이켜보면 나를 키운 것은 책상 위에 틀어박혀 묵독과 정독만 하는 독서법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조차도 혹시라도 너무 외로울 새라 또박또박 소리내어 글을 읽는 낭독,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대화였다. ‘도란도란, 소곤소곤, 속닥속닥’의 아름다움은 결코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대화와 소통의 무늬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직접 통화하는 것보다는 문자메시지나 SNS로 소통하다보니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울림이 그리워진다. 격앙된 술자리의 떠들썩한 대화소리보다는 커피나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가슴 속 이야기를 나누는 따스한 소통의 질감이 못내 그리워진다.

관련기사





돌이켜보면 나를 철들게 한 텍스트의 ‘팔할’은 아름다운 대화가 있는 풍경이었다. 사막에서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만나 오아시스를 찾으며 나누는 ‘존재를 진정으로 길들이는 법’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 끝도 없이 수다의 향연을 펼치는 빨강머리 앤과 엄격하고 도도하면서도 지적인 마릴라의 다정한 대화들, 문장 하나하나에 격정적인 사랑의 본질을 담아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브론테 자매의 영혼 깊숙이 화살처럼 박히는 격렬한 대화는 또 어떤가. 자신이 못 생기고, 보잘 것 없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얼마든지 무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항변하는 제인 에어의 반짝이는 눈빛은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통해 얼어붙은 로체스터의 심장을 단번에 사랑의 불길로 녹여버린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나누는 대화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일상적 대화와 다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뼈아픈 깨달음과 격정의 울림이다. 목숨걸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한 고백의 언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대화는 비록 저주와 증오가 깃들어 있는 순간에도 처절하게 아름답다.

이렇듯 아름다운 대화가 깃든 문학은 인간 정신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최고의 문화적 자산이 된다.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 턱없이 지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아름다운 문학 작품 속의 대화를 떠올리기도 하고, 소중한 이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주인공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토록 처절한 어둠 속에서 광기와 우울을 자양분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버텨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쩌면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사는가’는 우리가 나눈 따스한 대화들로 판가름날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듣기 좋게 마치 아름다운 음악소리처럼 굽이쳐 흐르는 대화의 영롱함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도란도란, 소곤소곤, 속닥속닥, 이 아름다운 의태어들은 인간의 일상적 대화를 아름다운 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