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붉은 깃발’을 든 사람들

한영일 바이오IT부장

車 등장 가로막은 英 '붉은깃발법'

차량공유 등 한국서 재연 분위기

인류문명은 새로움이 이기는 역사

기득권에 막혀 혁신 멈출순 없어




자동차가 사람보다 앞서 가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다면 어떨까.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라고 혀를 찰 것 같지만 1865년 영국에 실재했던 법이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에서 등장한 바로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이다.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사·기관원·기수 등 3명이 있어야 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에서 차를 선도해야 하고 최고 시속은 당시 성능의 10%인 시속 3.2㎞ 이내로 제한됐다. 겉으로는 ‘안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자동차의 등장에 따라 기존의 마차 사업을 보호하고 마부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법은 30년이나 지속됐다. 결국 영국은 자동차를 가장 먼저 만들고도 이후 주도권을 미국·독일·프랑스 등에 내주고 말았다.

150년 전 ‘붉은 깃발’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다시 휘날리고 있다. 이해당사자들에 막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차량공유나 원격의료 등 신규 서비스들을 놓고 하는 말이다. ‘한국판 우버’를 꿈꾸며 사업을 시작한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 ‘풀러스’는 지난달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정보기술(IT)의 발달에 힘입어 값싸고 편리함이라는 이점에도 택시 업계의 강력한 반발과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결국 신사업의 날개가 꺾였다. 스타트업의 상징으로 부상한 우버와 그랩 등은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신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IT 강국이라는 한국에서는 기득권 세력에 막혀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에 놓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이제는 ‘IT의 섬’으로 고립돼가는 듯하다.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원격의료도 마찬가지다. 첨단기기로 소비자들이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손쉽게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아직 의료인끼리로만 국한된 채 제한적 서비스만 진행되고 있다. 의료 분야의 규제혁신이 당면 과제라는 점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의료기기 규제 완화를 피력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얼마 전 원격의료 확대 의지를 내비치며 전향적 자세를 취했지만 그 직후 의사를 비롯한 의료단체의 우려가 이곳저곳에서 나오면서 결국 또다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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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국민들의 한 해 외래진료 횟수가 17번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병원을 가장 많이 찾는 국가다. 국가건강보험 시스템이 잘 갖춰져 다른 나라보다 부담 없이 병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상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3명으로 가장 적다. 앞으로 고령화가 더 급속히 진행될수록 이 같은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이다. 원격의료는 직접 병원에 가지 않아도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병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국가에 이 같은 시스템이 가장 필요하지 않은가.

택시 기사들은 승차공유 서비스가 도입되면 결국 수입이 줄 것을 우려한다. 의사들도 원격의료가 결국 자신들의 ‘밥그릇’ 크기를 줄게 만들 것으로 우려해 두 손 들어 막고 있다. 150년 전 마부들이 자동차 등장에 맞선 형국이나 다르지 않다. 마차는 자동차를 이기지 못했다. 인류 역사와 문명은 언제나 새로움이 기득권을 밀치고 발전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은 자명하다.

하나의 신체제가 등장하고 구체제가 밀려나는 과정에서 기득권의 저항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할수록 저항하고 또 충돌하는 일은 잦아질 것이다. 차량공유와 원격의료는 작은 시작일지 모른다. 정부 부처와 정치권·4차산업혁명위원회 등이 진정으로 혁신성장을 꿈꾼다면 규제혁신에 더욱 강한 의지를 다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산업혁명 시기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서 간신히 글로벌 흐름을 탄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뒤로 밀리고 말 것이다. 뜸 들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시간이 별로 없다. /hanul@sedaily.com

한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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