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신뢰

박 종 복

SC제일은행장




지난겨울 영하 20도를 육박하는 추운 밤길에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 어느 학생을 목격한 적이 있다. 분명 택시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막상 빈 택시가 오면 번호판을 확인한 후 번번이 그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추위에 발을 구르면서도 미리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느라 눈앞의 빈 택시를 수차례 그대로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그 학생은 얼마 후 예약한 택시를 만나 무사히 탑승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요즘 젊은이들의 예약 문화는 이런 신뢰가 바탕이 돼 굴러가는구나’하는 것이었다. 추위 때문에라도 먼저 온 빈 택시를 타고 예약 택시는 취소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학생은 택시기사와의 작은 신뢰를 지켰다.


무엇을 하든 예약이 필수인 시대가 됐다. 각종 교통수단은 물론이고 영화관·식당·병원·미용실·숙박업소 등 사회 각 분야에 예약 문화가 널리 확산해 있다. 정해진 시간에 내 순서가 돌아오고 내 자리가 확보돼 있고 나만을 위한 서비스가 기다리는 편리한 세상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힘은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에서 비롯된다. 필자가 학창시절 영화를 볼 때에는 극장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가 입장 시간이 되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밀치며 일제히 상영관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는 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믿기나 할지 모르겠다. 많은 것들이 불안정해 극장 좌석마저 경쟁을 통해 차지해야 했던 우리 사회가 오늘날 기술의 진보와 함께 이런 안정적인 신용 인프라를 갖춘 것을 보면 참 감회가 새롭다. 그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사회 곳곳의 작은 신뢰들이 쌓여 이룬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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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도 아주 오래전부터 고객과의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요즘은 금리나 수수료를 비교해보고 작은 차이에도 오랫동안 거래하던 은행을 바꾸는 고객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고객이 일시적인 수익보다는 본인의 금융 이력을 잘 알고 그에 맞게 컨설팅해주는 은행원을 믿고 거래를 맡긴다. 은행원도 그런 분들에게 정성을 다하게 되며 결국 장기적으로는 거래를 옮긴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지난 1979년 필자가 은행에 입사해 신입 행원 연수를 받을 때 은행에서 돈 세는 방법보다 먼저 배운 것이 고객과의 신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철학에는 변함이 없다. 은행이 전통을 유지하며 고객이 믿고 거래할 수 있는 신용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첨단의 핀테크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상황에 걸맞은 한층 강화된 소비자보호와 신뢰문화의 구축에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기술 진보가 빨라질수록 신뢰의 값어치는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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