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삼일빌딩

창가에 몰려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혼잣말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서른, 서른 하나.” 지금은 업무용 빌딩이 들어선 서울 종로 옛 화신백화점에서 지난 1970년대 초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그들의 눈과 손가락이 향했던 곳은 유독 높이 솟은 검은 유리 건물. 도심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높은 높이 110m, 31층 규모로 지어진 삼일빌딩이다. 청계천 고가도로 옆 종로구 관철동 10-2에 자리 잡고 있는 삼일빌딩은 1985년 여의도 63빌딩이 준공될 때까지 15년 동안 서울 시내 마천루의 상징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축물 높이가 35m만 넘으면 일선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건설부의 인가 대상이었다. 이런 와중에 높이 1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삼일빌딩 최상층의 스카이라운지를 심심치 않게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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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삼미그룹의 모태인 대일목재공업이 지은 삼일빌딩의 설계를 맡은 것은 프랑스대사관, 명보극장, 서강대 본관 등 많은 수작을 남긴 건축가 고(故) 김중업씨다. 하지만 그가 서울 시내 최고층 빌딩 설계자라는 명예를 얻은 대가는 컸다. 그해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아파트 붕괴를 두고 서울시의 부실행정을 비판했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면서 삼일빌딩 설계비를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세무조사로 집까지 날리고 도망치듯 프랑스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건축주였던 삼미그룹의 운명도 순탄치 못했다. 제5공화국의 비호 속에 한때 프로야구 구단까지 운영할 정도로 잘나갔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1985년 삼일빌딩을 산업은행에 넘겨야 했다. 마침 그해 여의도 63빌딩이 준공되면서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의 자리도 넘겨주게 됐으니 기막힌 우연이다.

최근 삼일빌딩이 이지스자산운용사와 미국계 부동산투자회사인 그린오크 컨소시엄에 매각됐다고 한다. 2001년 산업은행이 홍콩계 투자회사인 스몰록인베스트먼트에 건물을 매각한 지 17년 만이다. 몇 차례 주인이 바뀌기는 했지만 청계천을 오갈 때마다 주변의 화려한 마천루 속에서도 여전히 삼일빌딩을 마주 대하는 게 즐거운 것은 건축 속에 오롯이 녹아든 크고 작은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정두환 논설위원

정두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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