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내가 고향을 떠날 때 세 살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68년이 지났어요. 그 애가 일흔한 살이야. 많이 미안하죠.”
오는 20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남측 방문단으로 선정된 황우석(89·사진)씨는 딸 영숙씨와의 만남을 앞두고 설레어하면서도 아버지 없이 홀로 긴 세월을 살아낸 딸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씨는 ‘만나면 딸에게 뭐라고 첫마디를 해주고 싶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까지 살아줘서, 살아서 만나게 돼서 감사하다고 얘기해줄 것”이라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래도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줘서 진짜 고맙다”고 말했다.
황씨는 38선 이남의 미수복지인 황해도 연백군 출신이다. 1951년 1·4후퇴 때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3개월만 숨어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남북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지면서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겨우 세 살 때 헤어진 딸이라 사실 황씨는 딸의 모습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황씨는 “강산이 일곱 번 변했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황씨는 딸을 위한 선물로 손목시계를 준비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베풀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값비싼 선물로라도 대신하고 싶지만 이산가족 상봉 규정에서는 금·은 등과 같은 귀금속 선물을 금지하고 있다.
황씨는 30년 전 이산가족 신청 제도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냈다.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낙심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딸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그 사이 황씨의 부모와 처·여동생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대신 영숙씨가 서른아홉 살 된 딸, 황씨에게는 외손녀가 되는 새 혈육을 데리고 나올 예정이다.
황씨는 “부녀 상봉이라는 것이 참 소설 같은 얘기”라며 “한국에서나 있을 일이지 다른 나라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국만 지금 유일한 분단국가”라며 “빨리 통일이 돼 왕래도 하고 서신 연락도 하고 전화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애타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한편 지난 2015년 이후 3년 만에 재개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는 자식을 만나는 황씨뿐 아니라 형제자매를 만나게 된 고령의 이산가족들도 있다. 박기동(82)씨는 “북쪽에 거주했던 부모님과 함께 상봉하기를 원했으나 돌아가셨다는 통지를 받았다”며 “(이번에) 형제들의 생사가 확인되고 상봉 의사가 있다고 회보가 돼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생들에 대한 기억이 이름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형을 만나게 된 이수남(77)씨도 마찬가지다. 이수남씨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북녘의 큰형 종성(85)씨를 만나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쪽에 거주하는 둘째 형 종식(82)씨도 소식을 들은 후 첫 반응이 “거짓말 아니냐”였다. 서울 이태원 부근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종성씨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해, 천도복숭아 제철이 끝나갈 무렵 인민군에 징집됐다. 당시 만 19세였다. 이수남씨가 간직한 사진에서도 종성씨는 빡빡머리 10대다. 이수남씨는 “살아계셔서 고맙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취재단·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