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시 근로자 100인이 넘는 중견 제조업체 A사는 매월 근로자에게 기본급에 더해 수십만원씩 직무수당을 추가 지급한다. 기본급은 연공급으로 근속년수에 따라 변화한다. 기본급은 이처럼 호봉제지만 A사는 국내 연구기관들이 통계를 작성할 때마다 직무급 도입 기업으로 분류된다. 단지 직무수당을 지급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통계의 허점을 걸러내기 위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달 말 ‘임금체계 및 인력운용 실태조사’ 용역을 발주했다. 100인 이상 국내 사업체에서 직무급을 도입한 비율을 정확히 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조사는 2016년에 이어 또 한 번 실시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 민간조사기관들은 직무급·직능급 등 성과급여 체계를 도입한 기업 현황을 조사해 발표해왔다. 하지만 조사마다 비율이 천차만별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조사기관별로 적게는 16.5%부터 많게는 46.5%에 이르기도 한다. 지난해 한국경제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500대 기업 중 직능급을 도입한 비율이 34.5%, 직무급은 13.5%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연구원은 현장의 목소리를 토대로 적확한 의미의 직무·직능급을 도입한 기업은 외국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본다. 오계택 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미국·유럽 같은 서구권에서 인정하는 직무·직능급 체계는 근로자 개인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기초로 기본급부터 급여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라며 “개인의 직무·성과를 반영한 일부 수당을 지급한다고 해서 호봉제 위주의 임금체계를 개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동연구원이 서구권의 잣대로 추정한 기업들의 직무급 도입 비율은 5%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기존 통계가 직무·직능급 도입 기업 비율을 과대 추정하는 것은 조사방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본급을 연공급으로 주고 직무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는 기업은 “귀사가 채택한 급여체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호봉제라고도 답할 수 있고 직무급제라고도 답할 수 있는데 상당수 기업이 직무급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직무급과 호봉제를 정확히 나눌 수 있는 보다 정밀한 조사 방식이 도입돼야 한다는 게 노동연구원 분석이다.
근속년수가 아닌 개인의 직무 또는 업무능력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직능급 도입은 고용시장의 환경 변화에 따라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임금 시스템의 대수술이다. 문재인 정부가 강력히 밀어붙이는 개혁안이기도 하다. 노동연구원 역시 “정년연장, 통상임금범위 확대, 근로시간 단축 논의 등 최근 노동시장 제도 변화는 직무를 키워드로 기업의 인사관리와 전체 노동시장시스템이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가운데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더디기만 한 형편이다. 정부는 지난해 인천국제공항공사를 필두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호봉제를 직무급 체계로 개편하는 개혁안을 내놨다. 고용노동부는 공공부문 표준임금체계(직무급) 모델도 제시하며 개혁을 유도했다.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되 임금 체계를 수술해 고비용 구조를 줄이라는 요구다. 그러나 실상은 정부가 계획하는 약 42만명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대상자 가운데 지난달 기준 13만명이 전환을 완료했지만 직무급으로 임금 체계를 바꾼 기관은 드물다. 고용부는 올 연말까지 공공부문에서 직무급 도입 현황을 집계해 발표할 예정이다.
직무급 등 성과 급여체계 도입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근로자들의 강력한 반발 탓이다. 노동계는 직무급제가 도입되면 고임금 직무 근로자와 저임금 직무 근로자의 차별이 심화해 ‘근로자 계층화’가 고착화한다고 주장한다. 또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대원칙 아래 전체 기업과 근로자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표준 모델을 우선 만들어야 개별 사업장에서 직무·직능급 도입이 가능하다는 점도 한 과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직무·직능급 확산을 위해선 산별 노조처럼 한 산업, 또는 노동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근로자 조직과 사용자 대표들이 오랜 시간 논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며 “노사 대립이 극심해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못하는 국내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