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선생님, 머리에 든 게 있기는 해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시내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1년 차 간호사 정모씨는 출근 첫날부터 태움에 시달렸다. 정씨의 상급자들은 처음 해보는 일을 환자 앞에서 시키고 이를 잘해내지 못하면 “머리가 없느냐” “생각 좀 해라”며 정씨를 비꼬았다. 이를 목격한 환자는 정씨의 간호 행위를 거부했고 태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차팅(간호기록) 실수에 병동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펜과 가위가 날아오기도 했다. “퇴근하고 공부 안 하고 남자만 만나러 다니느냐”는 인신공격은 기본이었다. 반복되는 자살 충동으로 정씨는 결국 이달 초에 퇴사를 선택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근무 중인 박모씨는 지난 2월 아산병원 박 간호사 사건 이후 병원 현장에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몇 달이나 시간을 줬는데 적응을 못했다더라’ ‘병동 분위기는 문제없는데 그랬다더라’며 고인의 죽음을 폄하하는 말만 돌았다”고 전했다. 아울러 “태움은 당사자가 아니면 동기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벌어진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대형 대학병원을 그만둔 간호사 신모씨는 “로컬병원과 상급종합병원에서 모두 일해봤는데 태움이 없는 병동은 없었다”며 “과로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태움이 심해진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발표된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2만9,620명의 3분의2가량인 66.2%가 병원에서 폭언을 경험했고 19.2%는 태움을 당했다고 답했다. 간호사에게 태움은 ‘사건’이 아닌 ‘일상’에 가까웠다.
신규 간호사는 담당 선배격인 ‘프리셉터’를 통해 도제식으로 일을 배운다. 간호행위는 섬세하고 복잡한데다 단계별 매뉴얼을 따라야 하는 터라 초보자의 실수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실수는 곧바로 태움의 빌미로 작용한다. 인력 부족에 따른 과로는 악순환을 가속화하고 태움은 결국 환자의 안전마저 위협한다. 현장 간호사들은 태움이 두려워 작은 실수나 사고를 은폐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박씨는 “태움을 당한 간호사는 ‘언제 또 모욕적인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긴장상태에 놓이고 잘못된 약을 투약하는 등의 실수와 사고는 빈번해진다”면서 “이를 이실직고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혼나다 보니 요령껏 숨기는 사례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신규 간호사가 업무에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2~3년 정도가 소요된다. 하지만 태움을 못 버티고 1년 안에 퇴사하면 사실상 환자들은 실수투성이 간호사에게 맡겨지는 셈이라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경력 1년 미만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은 33.9%에 달했다.
간호사들은 태움뿐만 아니라 환자와 의사의 성추행에도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지난달 보건노조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13.3%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또 서울의 한 상급병원 간호사 윤모씨는 “환자나 환자 가족이 가슴과 엉덩이를 슬쩍 건드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며 “일일이 보고해봤자 병원이나 상급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조치가 없어 그냥 넘어간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김모(가명)씨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환자가 ‘나랑 성관계하자’며 용돈을 주겠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수치스러웠다”면서 “교수는 간호사라면 그런 일은 의연히 넘겨야 한다며 무시하더라”고 회상했다. 16일에는 강원대병원 수술실에서 묵인돼 온 의사의 성추행이 밝혀지기도 했다. 소속 간호사 37명은 “그동안 의사들이 수술 중 껴안거나 만지는 등 추행했고 위험한 수술 도구를 던지며 욕설과 폭언을 쏟아냈다”고 폭로했다.
병원에서는 성추행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다 보니 간호사들 상당수는 상급자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특히 환자는 매출과 직결되는 만큼 신고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결국 간호사들은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없는 상태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셈이다. 보건노조 관계자는 “태움과 성추행으로 낮은 연차의 퇴사자가 대거 발생하고 이는 다시 과로와 태움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게 병원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