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폐지하고 원금 돌려주세요. 60세까지 직장생활이 불투명한데 68세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최근 정부가 국민연금 개편에 돌입하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최근 2주 사이 2,000건 이상이 게재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상징과 같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개설 1년을 맞은 가운데 정부 비판의 배출구가 되고 있다. 1년 전 문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목소리를 경청하겠다는 취지로 국민청원을 시작했지만 정부를 겨냥하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국민청원 개설 초기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문 대통령과 적폐청산을 지지하는 청원이 주를 이뤘다면 현재는 오히려 악화된 민심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1년 동안 국민청원은 수치상으로 폭발적인 참여를 일으켰다. 개설 1주년인 지난 17일 기준 청와대에 쏟아진 청원은 26만5,000건을 기록했다. 이 중 청원 답변 기준인 동의자 수 20만명을 넘어 정부와 청와대의 공개 답변이 이뤄진 경우는 총 46건이었다. 한 달에 4번, 주 1회꼴로 기준선(20만명)을 넘어선 ‘국민적 청원’이 나왔다. 하루평균 724건의 청원이 올라왔고 답변 청원에 동의한 전체 국민은 1,239만2,726명에 달했다. 그동안 적절한 창구를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국민들이 너도나도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이에 일종의 신문고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게시판이 열리자 초반에는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쏟아졌다. 법과 정치권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숙원을 해소하는 창구로서의 기능도 했다. 지난해 9월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14세 미만의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했다. 소년법 개정이 청원으로 올라왔고 정부 답변 1호가 됐다. 단역 배우 자매 자살 사건이나 고 장자연씨 사건을 재수사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마다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글이 도배됐다.
이처럼 민원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했던 국민청원은 지난해 말부터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적폐청산’ 식의 청원이 주를 이뤘던 초기와 달리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암호화폐 규제에 항의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때 즈음 쏟아졌다. 당시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청원인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왜 정부에서 마음대로 하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평창올림픽에서의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과 한반도기를 반대한다는 청원이 쏟아졌다. 단일팀이 올림픽을 준비한 국가대표팀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비난 역시 가해졌다. 문 대통령의 핵심 국정철학의 하나인 공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극적인 남북 정상회담 이후 치러진 6월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압승을 거뒀지만 국민청원의 민심은 곧장 싸늘해졌다. 선거 직후 “예멘 난민 수용을 거부한다”는 취지의 청원이 올라왔다. 더구나 청와대가 청원상의 일부 표현을 문제로 게시글을 삭제해 논란은 더욱 커졌다. 난민법 폐지 청원이 71만4,875명을 기록해 역대 최대 동의를 끌어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와 주 52시간 근로제 정착, 종부세 개편 권고안 등 민감한 경제·노동 현안마다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 찬반을 겨루는 국민청원은 더욱 늘어났다. 이달 초 정부 여당의 전기요금 감면안 발표 후 상황은 극에 달했다. 전기요금 감면안 발표 후 “국민을 기만하느냐”는 반발성 청원글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국민연금 개편안은 이처럼 불난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 가치의 충돌 등 청원의 내용이 첨예할수록 뚜렷한 해결책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 정부의 국정철학과 어긋나는 청원이 제기되면 모호한 태도를 보여 비난을 자초했다. ‘난민수용 반대’와 ‘개 식용 반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내 요구에 답한다’는 외적 효능감(external efficacy)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부와 청와대 책임자들이 직접 답변을 하면서 ‘내가 직접 정치에 참여해 영향을 미친다’는 내적 효능감(internal efficacy)은 극대화됐지만 외적 효능감은 급격히 낮아졌다”며 “청와대보다 국회로 참여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모든 민의가 집중되는 현상은 민주주의의 결점을 드러내는 한계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문제를 정치와 법적인 제도 내에서 해결하지 않고 대통령의 권력에 기댈수록 민심 이반과 함께 대통령이 고립되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