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9월15일 미국 월가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투자자들이 앞다퉈 안전자산 확보에 나서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외지급능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치솟았고 원화 가치는 급락했다. 위기 직전 1,100원 안팎이던 원·달러 환율이 순식간에 1,600원 가까이 치솟았다. 정부는 환율 방어에 갖은 애를 썼지만 먹히지 않았다. 2007년 2,600억달러가 넘었던 외환보유액은 1년 만에 2,000억달러가 위태로운 수준까지 줄었다.
외국인 투자자금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그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투자자금 1,758억달러가 유출됐다. 외국인이 국내 시장에서 들고 있던 주식자금은 170조7,220억원으로 줄었다. 2007년 325조3,990억원에서 절반이 사라졌다. 사실상 ‘글로벌 현금인출기(ATM)’였다.
정부가 자금 회수에 나선 외국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300억달러의 유동성을 공급하고 1,000억달러 규모의 외화지급보증까지 섰지만 외국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외환위기의 문턱에서 상황을 진정시킨 것은 한미 통화스와프였다. 300억달러 규모였지만 달러 유동성 경색에 대한 우려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이 보증을 서면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지금은 어떨까.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위기까지 거치면서 우리 정부는 경제체질 개선과 외환 안전판 확보에 온 힘을 썼다. 우리 외환보유액은 8월 말 기준 4,011억달러로 사상 처음으로 4,000억달러를 넘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많다. 경상수지는 74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취약한 단기외채 비중은 6월 말 기준 28.4%로 5년째 20%대를 유지하고 있고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도 31.3%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 수치는 각각 53.6%, 79.3%에 달했다.
그런데도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 자본시장의 특성상 ‘리먼 쇼크’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도가 높아 외국인투자가들이 언제든 돈을 넣고 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금융시장에서는 여전히 신흥국, 원화는 준위험자산으로 여겨져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국제금융시장에 위기만 생기면 우리나라가 ‘글로벌 ATM’ 신세가 되는 이유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7월 말 기준 국내 시장에서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채권 등 증권투자 잔액은 704조7,670억원에 달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7년 말 363조원보다 두 배 많은 수치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 돈은 하루아침에 빠져나갈 수 있다. 위험자산으로 분류돼 위기 때 외국인이 처분할 가능성이 더 높은 주식·펀드 등만 따져도 592조7,240억원이다.
외환시장의 최후의 안전판인 통화스와프도 아직 부실하다. 2008년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막았던 한미 통화스와프는 2010년 종료됐다. 미국은 일본·영국·유럽중앙은행·스위스와는 무제한의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스위스·호주·인도네시아 등과도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데다 달러 형태가 아니고 치앙마이이니셔티브(CMIM)는 다자간 통화스와프라 위기 때 실효성이 낮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대규모 자금유출이 일어나는 비상사태에서는 결국 미국이 달러 유동성을 공급해주는지가 핵심”이라며 “긴밀한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세종=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