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용돈을 받는 게 민망해요.”
박모(27·여)씨는 매년 60~100개의 입사 지원서를 썼지만 아직 취업하지 못했다. 자존감이 떨어지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다. 특히 친척들이 모이는 추석 명절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공무원 준비를 해봐라, 대학원을 가보라, 한마디씩 하시는데 그냥 관심을 꺼줬으면 좋겠어요”
#“사촌 동생이 저보다 먼저 취업했어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거든요. 추석 때 만나는 게 괴로워요.” 서울권 대학 문과계열을 졸업한 이모(26·여)씨는 2년째 사기업, 언론사 등을 가리지 않고 지원하고 있지만 성과는 없다. “저도 직업이 정해진 과나 학교에 진학했다면 ‘장수 취준생’은 안 됐을 거라는 후회를 해요.”
■ ‘명절 오지랖’은 공포 그 자체
매년 돌아오는 ‘명절 오지랖’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큰 스트레스다. 친척 어른들은 관심과 애정을 표시한다지만 취준생으로서는 그만한 고통도 없다. ‘오지랖이 넓다’는 ‘남의 인생에 주제 넘게 참견 또는 간섭하는 사람’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21일 취업 포털 알바몬은 전국의 성인남녀 2,2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한 결과 취준생 가운데 52.8%는 ‘올 추석 친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직장인 및 취준생 2,8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더라도 응답자의 80.2%가 ‘명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추석 때 가장 듣기 싫은 말로는 ‘언제 취업할 거니’(73.6%·이하 복수응답)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살 좀 빼라·얼굴 좋아졌네(30.9%) △아무개는 어디에 취업했다더라(18.8%) △사귀는 사람은 있니(18.2%)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동안 친하지도 않던 친척 어른들이 덕담으로 포장해 취업부터 외모, 애정 관계까지 잔소리를 하면서 취준생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취준생의 51.1%는 과거에 ‘명절 우울증’을 겪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울증 경험자의 주된 증상은 ‘의욕상실’이라는 응답이 69%에 달했다. 이어 △소화불량(31.2%) △두통(22.8%) △불면증(18.1%) △식욕감퇴(12.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절대피소’라는 웃지 못할 새로운 풍속도마저 생기고 있다. 어학 학원이나 스터디카페, 프랜차이즈들은 마케팅 차원에서 취준생에게 고향에 가지 않아도 될 명분을 만들어주고 있다. 명절대피소란 말은 한 영어학원에서 광고용 카피로 처음 사용됐지만 지금은 책방, 주점, 숙박업소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파고다어학원의 경우 오는 22~25일 전국 7개 지점에서 연휴기간 무제한 인강 이용권, 자습실, 간단한 음식과 음료 등을 제공한다.
■장수 취준생으로 가는 길, 학습된 무기력
전문가들은 명절대피소라는 기형적인 문화까지 나타날 정도인 만큼 기성세대들이 청년층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지랖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할 때 나오는 현상이다. 궁금한 점이 있더라도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취준생 당사자라는 사실을 먼저 배려하며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10.0%에 이른다. 전체 실업률 5.3%의 2배에 달한다. 실제 청년층의 취업난은 더 심각하다. 잠재구직자와 잠재취업가능자를 포함한 고용보조지표3(확장실업률)의 경우 청년층은 23%에 이른다. 청년층 4명 가운데 1명은 사실상 실업자라는 뜻이다.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자포자기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 64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구직자의 82.5%는 어떤 시도를 해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 미리 포기하는 ‘학습된 무기력’을 겪었다고 답한 바 있다.
그렇다면 취준생들이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2년전 알바몬 조사에 따르면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힘내!’라는 답변이 38.09%로 가장 많았다. 이어 ‘넌 잘하리라 믿어!’(23.81%), ‘신중하게 잘 선택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야!’(19.05%), ‘용돈, 필요하지?’(14.29%), ‘고생이 많지?’(4.76%) 등이 뒤를 이었다. 같은 내용의 관심을 표명하더라도 애정 어린 위로, 용돈을 건네거나 용기를 북돋아 줄 때는 잔소리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