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감옥에서 7건의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살인범과 자백을 믿고 사건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실화극. 주지훈은 감옥 안에서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살인범 강태오로 분했다. 무엇보다 감옥 안에서 손바닥 위에 형사를 올려놓듯 자신이 저지른 암수살인을 자백하며 수사 과정을 리드하는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살인범이다.
‘암수살인’ 김태균 감독은 ‘아수라’ 속 주지훈이 연기한 선과 악의 경계에 놓인 형사 문선모 캐릭터를 본 후 “태오를 제대로 찾았다”며 캐스팅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손에 들어온 대본을 손에 든 주지훈은 굉장히 탄탄하고 재미있는 시나리오에 끌렸다고 했다. 하지만 배우의 욕망과 걱정이 동시에 몰려왔다.
“어떤 강렬한 캐릭터를 하고 싶다는 배우로서의 욕망과 이걸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양날의 검처럼 느껴져 고민했던 부분이 있어요. 접견실이란 공간 속에서 형사와 살인범 둘의 심리전으로 보여줘야 하는 영화잖아요. 이 속에서 어떻게 보면 장르물로서의 액션이라든가, 추격이라든가, 쾌감 등의 재미를 드려야 하는데 내가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란 고민을 많이 했었죠.”
오로지 강태오의 증언과 김형민의 수사가 영화의 긴장감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어떻게 하면 상업영화로서 쾌감을 끌고 갈 수 있을까?”가 고민의 포인트였다. 김윤석 배우가 먼저 캐스팅이 되어 있다는 소식은 “든든한 아군, 지원군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역시나 김윤석의 존재는 주지훈에게 큰 신뢰감과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사실 처음엔 너무 무서웠어요. 다층적인 캐릭터고 연기적으로 뛰어놀 수 있는 게 너무 많은 인물이라 연기하는 입장에선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나 싶었어요. 그 때
김윤석 선배가 먼저 캐스팅됐단 이야기를 듣고 비빌 언덕이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이 단단한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안정되던걸요. 무언의 신뢰감이 확 생기더라구요. 분명히 오래 길게 영화 작업을 하신 분인데, 내가 보지 못한 어떤 결을 보지 않으셨을까란 무언의 믿음이 있었어요. 또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주지훈은 캐릭터를 위해 삭발을 시도하고 노메이크업으로 촬영에 임했다. 감독이 차마 삭발을 얘기하지 못할 때, 주지훈이 선뜻 나서 삭발이 어울리겠다며 아이디어를 냈다. 강태오 특유의 ‘나태하면서도 세 보이고 싶어하는’ 걸음걸이를 만든 것 역시 주지훈의 제안을 통한 결정이었다.
“극단적인 성향의 캐릭터지 않나. 일상 공간에서 너무도 우발적이고 서슴없이 살인 행위를 벌이는 인물이다. 도망자 생활을 할 때 머리를 길렀다가, 짐승 우리 같은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 보이려 했을 것 같아서 삭발을 결심했을 것 같았어요. 재판 받을 때 반성하는 듯한 ‘쇼잉’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봤어요. 결과적으로는 삭발과 노메이크업이 배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스스로 삭발을 감행한 것에 대한 취재진들의 관심이 쏟아지자, 그는 “저의 피지컬이 도움이 되지 않은 현장이었다”는 특별한 일화를 꺼내놓았다. ‘암수살인’의 첫 촬영은 그에게 아찔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어떤 작품이든 첫 촬영이 너무 힘들어요. 모두가 긴장해요. 100여명의 스태프들 역시 다 낯선 사람이잖아요. 첫 장면이 택시 타고 밥집에 들어가는 장면인데, 제가 택시 운전사가 아닌 마치 제복을 입은 것처럼 보였어요. 큰 키와 큰 덩치가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강태오의 콘셉트에 대해 2시간 정도 고민하다 그 자리에서 삭발을 결정했어요. ‘시점 변화를 두자’그게 큰 결정이었죠. 좀 많은 변화를 주는 것보다는 그런 변곡점을 하나 정도 주는 걸로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의상 체인지를 했어요. 물론 힘들었었죠. 어느 순간 집중해야 하는데 멘탈이 한번 깨진 거잖아요. ”
영화 속 ‘강태오’는 흔한 연쇄살인 소재 영화의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닌, 실체에 대한 감정조차 불가능해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희대의 살인범이다. 관객들이 볼 땐 미쳐 날뛰는 인물 같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선 대사 한 문장을 하더라도 고개의 각도마저 세밀하게 계산해야 했다. 부산 사투리도 해야 하고, 카메라 앞에서 단순히 감정 과잉을 보여줄 수 없어, 조금 더 단계를 나누면서 세밀하게 접근해나갔다.
“강태오는 연기적으로 뛰어놀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인물이에요. 연기적으론 자유롭게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하나 다 계산이 돼 있었어요.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짰어요. 대사 한 마디에서 고개의 각도까지도요. 취조실의 경우 같은 공간에서 입체감과 질감을 어찌 달리 줄까 고민이 많아서, 어느 순간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어느 정도 넘기고 돌리고 하는 걸 다 계산하며 들어갔어요. ”
연기적인 스펙트럼을 뛰어넘는 일보다 더욱 힘들었던 작업이 사투리를 몸에 익히는 일이었다. 서울 암사동에서 태어나고 천호동에서 자란 주지훈은 영화에서 부산 토박이가 됐다. 실제 ‘암수살인’을 집필한 곽경택 감독과 스태프들, 배우들까지 전원 경상도 출신으로 구성된 팀에서 마치 고3 수험생처럼 부산 사투리를 익혔다. 운동하면서도 사투리 녹음 테이프를 듣고 길을 걸으면서도 들었다. 특히 중국어처럼 대사마다 성조를 그려가며 입에 익혔다.
“경상도 사투리에 대한 허들이 굉장히 높아요. 전 국민들이 굉장히 예민하게 생각하거든요. 다 부산 사람인 팀에서 제가 방해가 안 됐으면 한다는 마음이 있어서 계속 매달렸어요. 제가 제일 믿을 수 있는 건 곽경택 감독이어죠. 확실히 클래식한 명 감독님들이 그런 장기가 있으세요. 같이 작업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분들이시라 정말 감사하게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런 걸 써보면 어떻겠냐’고 아날로그 녹음기를 제안하셨어요. ‘다 녹음을 해줄테니까 해볼래’ 하시더라. ‘좋죠’ 라고 답했죠. ”
“녹음기를 들고 다니면서 하루에 사투리만 8시간~9시간 공부하며 연기했던 것 같아요. 촬영 전후로 각각 2시간씩 연습하고요. 부산 사투리는 강렬한 액센트와 불규칙한 성조가 있어서, 대본에 성조를 한 글자 한 글자 그리면서 연급했어요. 매번 길을 걸을 때도 들리는 대로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따라했어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키 크고 덩치 큰 애가 마스크 끼고 뭐라뭐라 하고 다니니까요.”
그의 노력은 결국 영화 속에서 제대로 빛을 봤다. 액션과 추격전 없이 주인공 2명의 심리적인 긴장감만으로 스릴러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증명했다. 이 시대의 파수꾼 같은 이들의 존재를 불러낸 영화 ‘암수살인’에 대한 초반 걱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지훈은 “장르물로서 쾌감, 전달하고 싶은 메인 메시지가 잘 전달이 된다고 받았어요. 감독님이 고생하셨구나 느낌도 받았다”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