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11일. 새벽 미명을 틈타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 건청궁을 나와 궁녀의 교자에 몸을 실었다. 교자는 곧바로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내수사 앞길을 거쳐 러시아 공관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고종을 맞은 이들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전날 조선에 급파된 100여명의 러시아 군인들이었다. 고종이 일제의 박해를 피해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은 탈출에 앞서 상궁을 태운 교자를 수시로 드나들게 만들어 일본의 경비를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앞서 1894년에는 일본군 2개 대대가 영추문으로 침입해 궁궐을 점령하기도 했다. 영추문이야말로 아프고 굴곡진 조선 말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경복궁에는 4개의 문이 있는데 왕은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光化門)으로만 다녔다. 영추문 혹은 연추문(延秋門)으로 불리는 서문은 궐내각사(궁궐 내의 관아)가 주로 궁궐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첫머리에는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연추문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나온다. ‘관동별곡’에는 또 ‘연추문 들이 달아 경회 남문 바라보며’라는 구절도 등장한다. 해가 뜨는 동쪽은 봄을 상징한다고 해 건춘문(建春門)이고 해가 지는 서쪽은 시들어가는 가을을 맞는다며 영추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연산군은 근정전에서 영추문에 이르는 구역을 가시로 막아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고도 전해진다.
영추문은 석축을 높게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터 문루를 얹은 구조다. 홍예 반자에는 ‘사신도’에서 서쪽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백호 두 마리와 우리의 전통무늬인 삼태극이 그려져 있다. 비록 광화문만큼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소담하면서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에 전차 때문에 석축이 무너져 철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문화재청이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영추문을 조만간 개방한다는 소식이다. 가까운 길을 돌아가야 했던 시민들의 불편도 줄어들겠지만 우리의 서글픈 과거를 돌이켜보는 소중한 기회일 듯하다. 영추문이 활짝 열리면 영추문 앞 역사책방을 지나 서촌 골목길이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