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미술품들이 거래되는 영국 런던 소더비경매의 ‘현대미술 이브닝경매’. 지난 5일(현지시간) 저녁에 진행된 이 경매에 영국 출신의 거리예술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이 출품됐다. 경합이 벌어졌고 전화응찰자가 부른 104만 파운드(약 15억원)에 거래가 성사됐다. 경매에 나온 뱅크시의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이다. 경매사가 낙찰봉을 내려치는 순간, 그림이 액자 아래로 스르륵 내려오면서 파쇄기를 돌린 듯 세로로 가늘게 잘리기 시작했다. 채 10초도 되지 않아 그림의 절반 가량이 완전히 잘렸고 붉은 풍선이 그려진 윗부분만 남았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곧이어 작가 뱅크시는 자신의 SNS에 경매 현장 사진과 함께 “진행중, 진행중, 진행완료(Going, going, gone)”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적었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동영상을 올렸다. 수 년 전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경매에 거래될 것을 감안해 액자 안쪽에 원격 조종으로 작동하는 파쇄장치를 설치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뱅크시는 “파괴하려는 충동 또한 창조의 충동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해 적었다. 앞서 뱅크시는 그림을 통해 지나친 자본논리와 미술품 경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얼굴과 국적,나이 등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작가 뱅크시는 기발한 유머와 신랄한 풍자가 담긴 그래피티(낙서같은 벽화)로 유명하다. 공개된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파리 루브르박물관, 런던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등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몰래 들어가 마치 원래 있던 작품이나 유물처럼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기행으로 이름을 알렸다. 최근에는 유럽 연합 국기에서 별 하나가 깨지며 푸른색 깃발 전체에 금이 가게 하는 그림으로 ‘브렉시트’를 꼬집기도 했다.
경매 직후 소더비 측은 “우리는 뱅크시 당했다(we just got Banksy-ed)”면서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경매 직후 작품이 파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구매자가 작품을 인수하기 전에 훼손됐을 경우 그 책임은 경매사 쪽에 있는 만큼 약 15억원에 낙찰받은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절반만 남은 그림이 현대미술사적 희대의 사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의미있는 작품이 됐으니 추후 더 큰 가격 상승을 기대할 수도 있는 만큼 구매자가 환불할 지 그림을 간직할 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하고 있다. 소더비 측은 구매 고객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