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근로시간단축 100일-대기업] 편법 안쓰면 업무 소화 못해…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하죠

회의 시간·저녁 야식 줄었지만

금요일 오후 되면 파장 분위기

업무 공백도 만만치 않아 우려

일하는 양 같은데 칼퇴근 압박 커

잔업은 커피숍 등서 처리 빈번

R&D는 주52시간 사실상 불가능

0915A02 주당 52



# 대형 철강 업체에 다니는 김모 과장. 1개월간 평균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에 맞추되 세부적인 일별·주별 근로시간은 본인이 알아서 정하면 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대상자다. 그래서 오전10시부터 오후4시까지만 일하면 앞뒤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다. 김 과장의 경우 업무가 몰리는 때가 아니면 오후4시에 칼퇴근한다. 이런 날에는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직행해 2시간쯤 땀을 뺀다. 그는 “이전에는 상사 눈치 때문에 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해 꿈도 못 꾸던 일”이라고 말했다.

# 반도체 회사의 이모 부장은 금요일만 되면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떨어지는 업무는 산더미인데 맡길 부하직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 부장은 일에 치여 주말을 반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부장은 “주말을 앞두고 업무지시를 내리려고 하면 젊은 친구들의 얼굴색이 달라진다”며 “법을 지킨다는데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우리 같은 중간관리자만 애매해졌다”고 푸념했다.

주52시간 근로 시행으로 대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일상도 바뀌고 있다. 장시간 근로에서 벗어나 일과 삶의 균형이 한결 나아졌다는 평가 속에 줄어든 노동시간에 맞춰 기존 업무를 완수해야 하는 데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겉으로는 정착하는 듯 보이지만 속을 뒤집어보면 복잡하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근로시간에 대한 재량이 커져 저녁 시간 활용이 쉬워졌다”면서도 “부서에 따라서는 해야 할 업무를 다 처리하지 못해 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업무 집중도 높아졌다”고 하지만=주52시간근로제가 공식적으로 시행된 지난 7월에 앞서 대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사전 시행해왔다. 삼성전자만 해도 지난해 11월부터 계도에 들어가 올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SK하이닉스·LG전자 등도 올 2월부터 실시했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근로시간이 주52시간이 넘을 것 같아 보이면 강제로 다음날 휴가를 보낼 정도”라며 “각 부서장들이 주52시간 근로에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근무시간 정책이 부서장들의 평가에도 반영되는 만큼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셈이다. 유화 업계의 한 관계자도 “쓸데없는 회의 등을 생략하고 각종 잡무도 나눠서 빠르게 처리하고 있다”며 “회식도 많이 줄었고 저녁보다 점심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대기업 사무실은 파장 분위기다.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업무 공백도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전자 업계의 한 임원은 “어떤 부서는 금요일 오후에 전화가 잘 안 될 때도 있다”며 “주말을 알차게 활용하려는 직원이 확연히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주52시간근로제가 업무효율을 우선시하는 문화 안착을 유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업무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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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일하기’ ‘부서·세대 간 갈등’ 등 부작용=같은 양의 일을 하면서 빠른 퇴근을 요구받는 데 따른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대기업 A사의 한 관계자는 “오후7시만 되면 PC를 꺼버린다”며 “업무에 몰입하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인데 업무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잔업을 집이나 주변 커피숍에서 할 때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B사의 한 관계자도 “인원 충원이 없으면 줄어든 업무시간으로 업무량을 감당하기 버겁다”며 “결국 편법으로 장시간 노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신제품 등의 연구개발(R&D) 직군은 주52시간 근로를 맞추기가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6개월 단위의 프로젝트 업무가 많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등은 6개월 단위로 끊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하되 평균 주당 52시간 근로를 맞추면 되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했지만 실제 활용은 미미한 편으로 알려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재량근무제의 경우 실제 도입 사례가 드물고 출퇴근 체크가 제대로 안 되는 문제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도입에 부담이 된다”며 “탄력근로제의 단위시간을 6개월이나 1년으로 늘려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서 간, 세대 간 갈등 소지도 있다. 홍보 직군의 경우 업무 특징상 평일 야간이나 주말도 제대로 쉬기 어렵고 저녁 약속의 경우도 대부분 업무로 인정받지 못해 불만이 적지 않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주52시간근로제 도입 이후 세대 간 반응이 다르다”며 “선임급들은 ‘일이 필요하면 자연히 남아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데 비해 젊은 직원들은 ‘워라밸’을 챙기는 세태가 강하다”고 말했다.
/이상훈·신희철·김우보기자 shlee@sedaily.com

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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