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종종 어디서 본 듯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앞서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일으키곤 한다. 남북정상회담 사흘째 날이던 지난달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두산을 함께 오른다는 뉴스가 전해지던 그날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는 두 남북 정상이 백두산을 배경으로 손잡고 앞으로 성큼 나아가는 그림이 현수막으로 걸렸다.
오는 21일까지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작가 이종구(63)의 ‘봄이 왔다 2’. 미리 알았던 것일까. 화가는 올 봄 판문점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부터 ‘봄이 왔다’ 연작을 구상해 4점을 내리 그린 것이라 했다. “상상과 희망이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어요. 두 정상이 처음 만난 4월 27일 이후 여름 내내 그린 그림들이거든요.”
그렇게 꿈이 이뤄졌다. ‘봄이 왔다’ 연작은 두 정상이 화사한 철쭉꽃밭을 배경으로 악수하는 모습, 백두산을 등지고 선 모습과 백두산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그려졌고, 마지막은 짙푸른 풀밭 위를 코뚜레 없이 힘차게 달리는 힘찬 황소 두 마리로 마무리했다. 학고재갤러리에서는 9년 만인 화가 이종구의 개인전 제목은 ‘광장_봄이 오다’. 현실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직설적으로 발언해 온 그다운 타이틀이다. 이종구는 누런 양곡포대에 그린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 나고 자란 고향 마을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풍경 등 곡괭이 쥔 손목 힘줄이 팽팽한 농부, 허리 굽고 이 빠진 노인의 너털웃음 등으로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 그다. 농부의 얼굴은 농촌의 현실 그 자체를 반영하기에 그가 그리는 인물화는 초상화가 아닌 ‘시대의 초상’으로 불린다.
그런 화가가 지난 2016년 말 광화문광장을 달군 촛불집회의 현장을 화폭에 옮겼다. 4년 전 위암 수술 후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추위를 뚫고 광장에 나갔고 광장에 나뒹굴던 전단지와 바닥에 붙었던 포스터를 모아왔다. 이를 콜라주 형식으로 붙였고 그림에는 피켓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붉은색 사각형을 배치했다.
“작업을 위한 오브제 겸 증거물로 수집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붙여놓으니 미학적으로 따지자면 촌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시도입니다만 작품의 미적 완결성에서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역사적 증거로서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100년 뒤 이 그림을 보는 관객들이 이 빨간 피켓의 뜻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기록이자 증거로 이미지 속에 새겼습니다.”
그림 속 광장의 시민들은 한겨울임에도 함께이고 희망이 있어 표정들이 밝다. 맨 오른쪽 태극기를 든 아이는 그 자체로 희망을 상징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인 단원고 학생들의 못다 이룬 수학여행을 그림으로 완성해 전시했다. 두 명의 이종구가 등장하는 자화상도 그렸다. 한 인물은 2016년 10월에 그린 시민으로서의 자신이며, 또 하나는 이듬해 4월에 그린 예술가로서의 자신이다. 예술가로서의 역할 인식이 엿보인다. “예술가는 역사를 그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근래 일어난 일들의 예술적 기록입니다. 저의 예술적 지향은 사람다운 삶의 가치와 세상에 있는 만큼, 앞으로도 역사와 현실,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로 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