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초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에서 발생한 협력업체 직원의 이산화탄소 질식 사고. 이 건을 조사 중인 주요 관공서는 경찰청을 비롯해 재난안전본부, 고용노동부, 소방서, 환경부 한강유역청, 한국가스안전공사,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이다. 대략 잡아도 7곳이다. 지역 산하 경찰서 등을 합치면 10곳이 넘는다. 재난 대응, 가스 누출, 노후 소화설비, 협력업체 부당 대우 등 따져볼 것이 많다지만 조사기관 간에 제대로 된 조율이 없다 보니 해당 사업장은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언제 조사가 마무리될지 현재로서는 예측도 어렵다.
정치권은 한술 더 뜬다. 조사가 한창인데도 ‘사건 축소·은폐’ ‘봐주기’ 등 의혹을 부추기고 있어서다. 관련 상임위원회(행정안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이정미·홍익표·이용득·정인화)뿐 아니라 박주민·김병욱 의원,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도 가세했다. 이 지사는 ‘위험의 외주화 중단’이라는 구호도 내놓았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재계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불행한 사고를 막는 데 역점을 두기보다는 ‘한 건 잡았다’는 식의 반응이 많다”고 우려했다. 다른 관계자도 “잘못된 부분은 고쳐야겠지만 전문업체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맡긴 업무를 마치 위험한 일을 떠넘긴 것처럼 호도해 놀랐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기업이 투자·고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균형감을 잃은 기업 몰아세우기는 이미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산재 피해자 구제 등 공익을 이유로 삼성전자에 반도체 생산공정, 라인 배치 등 민감한 기업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일단 8월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주며 제동이 걸렸지만 소송 결과에 따라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 재계의 한 임원은 “정부가 친노동정책을 최우선으로 두다 보니 기업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있다”며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기업에 대한 사정기관의 전방위 압박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른바 4대 사정기관(검찰·경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의 수사나 조사를 받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실제 삼성은 노조 와해 수사건으로 압수수색만 11차례 받았고 현대자동차·SK·LG·롯데 등도 지배구조, 조세포탈, 각종 법 위반 혐의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갑질 논란에서 시작된 한진에 대한 수사는 여론몰이식 표적수사로 뒷말을 낳고 있다. 여러 기관이 마치 충성 경쟁을 하듯 대기업 조사에 매달리다 보니 기업들이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시장의 목소리다.
경제검찰이라는 공정위만 해도 일감 몰아주기 대상을 대폭 확대한 공정거래법 개정을 지렛대로 기업 압박에 나섰다. 개정안은 오는 11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면 이르면 2020년 시행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다급해졌다. 그 결과 LG가 서브원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 사업을 떼어내 지분매각을 하기로 했고 SK는 SK해운 지분을 사모펀드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룹마다 떠밀리듯 해법 찾기에 나서 부작용이 염려될 정도다. 4일 SK하이닉스의 청주 낸드플래시 공장(M15) 준공식에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이라며 기업에 힘을 실었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한쪽에서는 투자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기업을 보여주기식, 망신주기식 수사로 벌집 쑤시듯 몰아붙이고 있다”며 “기업에 대한 경영 간섭을 최소화해야 움츠렸던 투자도 살아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