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손길은 간결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넓은 건반을 아우르고 커다란 진폭의 음계를 장악했다. 은발의 대가가 절제의 미학을 마음껏 뽐내며 장장 37분에 이르는 연주를 마치자 관객들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환호성을 지르며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62·사진)이 지난 19일 저녁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가진 15년 만의 내한 공연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로 불리는 지메르만은 이날 내한 공연에서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년)의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를 연주했다. 텅 빈 삶 속에서 신앙과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한 W. H. 오든의 시를 기반으로 작곡된 ‘불안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중 뉴욕 거리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외로운 젊은이 4명이 펼치는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이날 연주에서 지메르만은 최상의 퍼먼스를 보여줬다. 곡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리듬이 빨라지는 순간에도 결코 몸짓을 과장하거나 흥분하는 법이 없었으며,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노련한 절제미를 보이면서 오케스트라와의 하모니에 집중했다. 중간중간 피아노 연주의 휴지기가 있을 때마다 오케스트라가 자리한 왼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어 그들의 연주를 지긋이 감상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는 “과거 지메르만 연주의 핵심이 ‘폭발적인 열정’이었다면 근래 들어서는 확실히 고도로 정련된 원숙미가 돋보이는 것 같다”며 “특히 새벽이 밝아오는 가운데 주인공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묘사한 곡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이런 특징이 더욱 도드라졌다”고 평가했다.
지메르만은 지난 1990년 세상을 떠난 번스타인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불세출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번스타인은 노년에 이르러 ‘가장 선호하는 협연자’로 항상 지메르만을 꼽으며 여러 무대를 함께 꾸몄다. 지메르만이 ‘쇼팽 콩쿠르 우승’ 이력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우뚝 서는 데 번스타인과의 협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1986년 지메르만이 번스타인의 지휘 아래 ‘불안의 시대’를 연주했을 당시의 일화는 특히 감동적이다. 당시 번스타인은 지메르만에게 “내가 100살이 되면 다시 이 곡을 함께 연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지메르만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올해가 바로 번스타인의 탄생 100주년이다. 아마도 지메르만은 이날 내한 공연에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스승이자 예술적 동지를 향해 헌사를 바치는 심정으로 혼신의 연주를 펼쳤을 것이다.
이날 공연은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협연자로 나선 지메르만의 이름값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지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역시 7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정상급 교향악단 중 하나다. 2008년부터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인 에사 페카 살로넨(60)도 세계 클래식계에서 잔뼈가 굵은 거장이다. 이들은 이번 공연에서 지메르만과 협연한 ‘불안의 시대’ 외에 환상적인 분위기와 서정성이 돋보이는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 경쾌한 결기와 기개로 무장한 바르톡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관객에게 들려줬다.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