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재정적자를 대폭 늘린 이탈리아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 승인을 거부했다. EU가 특정 회원국의 예산안을 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이탈리아가 제출한 내년 예산안을 거부하고 3주 안에 수정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승인 거부 외에)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거부는 사실 예고된 수순이다. EU는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권이 공약 이행을 위해 감세 등 재정확장 정책을 쓰면 그리스식 채무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해왔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내년 예산안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를 전임 정권의 목표치(0.8%)의 3배인 2.4%까지 늘리겠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의 부채 규모는 GDP 대비 131%로 그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아 이 같은 정책을 고수할 경우 이탈리아발 재정위기가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EU의 전례 없는 ‘승인 거부’로 이탈리아는 3주 내 합의점을 찾고 수정안을 내놓지 않으면 규정에 따라 GDP의 0.2%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한다. 시점이 늦춰질 때마다 이탈리아에 부과되는 벌금은 늘어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며 예산안 수정 의사가 없다는 강경 입장을 보이고 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2.4%의 재정적자는 우리가 진지하게 준수하려는 한계치”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탈리아가 EU와 각을 세우는 데는 내년 5월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가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이탈리아는 극우 ‘동맹’과 좌파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이 정권을 잡고 있다. 내년 선거에서 반이민 등을 내세운 극우파가 의석을 상당히 늘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대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가 EU에 맞서는 이미지를 구축해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EU 의회의 장악력까지 높이려는 의도라는 해석이다.
문제는 이탈리아의 고집으로 금융시장에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전 세계은행들이 보유한 이탈리아 국채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WSJ은 “이탈리아가 위기에 빠지면 유럽중앙은행 통화정책에도 영향 줄 것”이라며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가 원활하게 이뤄질지 불투명한 가운데 이탈리아 불안마저 겹치면 유럽 경기는 위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