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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중·러 항일유적 답사기] 추모비도 없는 황량한 언덕…하늘도 울다

<1> 최재형 총살 현장

노비 아들로 태어나 연해주 이주

고기 군납으로 쌓은 막대한 자금

의병·독립운동 단체에 물밑 지원

안중근 의사와 이토 암살 모의도

일제 총탄에 숨진 현장엔 잡초만

고택은 내년 상반기 기념관 개관

최재형 선생이 일제에 총살당한 우수리스크의 왕바실재 언덕에서 소강석(오른쪽)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옆에서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다.최재형 선생이 일제에 총살당한 우수리스크의 왕바실재 언덕에서 소강석(오른쪽)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옆에서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다.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맞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봉기한 민족 최대 규모의 항일 투쟁이었다. 나라 안팎에 독립 의지와 저력을 알리고 항일 투쟁의 대중적 기반을 넓혔던 3·1 운동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서울경제신문은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과 함께 진행한 ‘항일 운동 유적 답사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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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 /연합뉴스최재형 선생. /연합뉴스


지난 23일 찾은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시(市).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112㎞ 떨어진 이 도시에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1858~1920) 선생의 고택이 있다. 훗날 ‘고려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 한민족이 19세기 중반부터 정착한 연해주는 항일 투쟁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우면서도 중국과 비교해 일제의 탄압이 덜 했기 때문에 안중근·이동휘·홍범도 등 내로라하는 우리 역사 속의 영웅들이 연해주를 무대로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근현대사 고등학교 교과서 6권 중 1권만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된 최재형은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초창기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기근과 주인의 탄압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연해주에 둥지를 틀었다. 지긋지긋한 집안 형편을 견디지 못하고 11세 때 감행한 가출은 최재형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상선 노동자로 일하며 선장의 총애를 독차지한 최재형은 무역회사 직원을 거쳐 군부대 통역관으로 일하며 고기 군납을 통해 연해주 최대의 거부로 성장했다. 이렇게 모은 재산을 최재형은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납했다. 1908년 의병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1911년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배후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올가의 회고록은 “안중근 의사는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에 앞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런 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보존된 최재형 선생의 고택러시아 우수리스크에 보존된 최재형 선생의 고택


우수리스크 시청에서 서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최재형의 고택은 선생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집이다. 녹이 슨 철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는 ‘독립운동의 대부’라는 별칭이 무색할 만큼 휑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현지 고려인 단체가 지난 2014년 러시아인으로부터 고택을 매입하고도 자금이 부족해 사실상 방치해 놓았다가 내년 상반기 기념관 형태의 옛집으로 개관하기 위해 막바지 작업 중이라고 한다. 선생이 집에 머물다가 인근의 산기슭으로 끌려가 일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 현장인 왕바실재 언덕은 한층 황량하고 볼품없었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토벌 작전을 개시했는데 최재형도 이 ‘4월 참변’의 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목숨을 바친 영웅이 하늘나라로 떠난 현장에서는 추모비 하나 찾기 힘들었다. 취재진과 동행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현지에 거주 중인 고려인들 옆에서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자 시커먼 먹구름만이 선생을 추모하며 슬피 울 듯 비를 흩뿌렸다. 소 이사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노비의 아들이었던 최재형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않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진 민족 영웅이었다”며 “정치권과 정부가 빨리 나서서 선생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사진(우수리스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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