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E클래스 주문을 넣으시면 올해 안에 받으실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올해 주문은 다 찼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메르세데스벤츠 매장의 한 딜러는 밀려드는 주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지난 여름 BMW의 주요 차량에서 잇따라 화재가 발생하며 지난 8월 벤츠와 BMW의 판매량이 줄어들자 “잘나가던 수입차도 안 팔린다”는 말이 돌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차가 없어 못 팔고 있다. 경기도 부천의 한 BMW 딜러는 “가솔린 모델인 530i M 스포츠 모델의 경우에는 올해 받을 수 없다”며 “디젤 고객이 줄면서 가솔린 모델은 더 늘었지만 차가 없어 못 판다”고 설명했다. 수입차 판매 증가세가 주춤한 이유는 수요가 줄어서가 아니다. 글로벌 본사가 한국에 배정하는 물량을 줄인데다 정부가 9월 디젤차에 대한 연비 및 배출가스 측정방식을 국제표준시험방식(WLTP)으로 변경하면서 주요 모델들이 새로운 인증을 거치며 물량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BMW 딜러는 “5시리즈와 X3를 빼면 현재 팔리는 모델은 모두 구형 모델”이라며 “내년 신차가 국내 시장에 쏟아지면 판매량은 다시 치솟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량 화재, 디젤게이트 등에 숨죽였던 수입차들이 올해 말부터 한국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융단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가 실적악화에 벼랑 끝으로 몰리는 동안 수입차들은 안방까지 차지할 욕심으로 달려들고 있다.
29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벤츠의 자동차할부금융을 제공하는 메르세데스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는 23일 나이스신용평가에서 5,000억원 한도의 회사채 발행에 대한 신용평가등급(A+)을 받았다. 판매량이 늘 것을 대비해 벤츠파이낸셜이 할부금융 실탄을 확보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수입차 1위 벤츠가 회사채 한도까지 늘린 만큼 내년 신차 출시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판매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벤츠가 내년 내놓는 신차들은 모두 국내 인기차종들이다. 벤츠는 올해 말과 내년 1·4분기 엔트리 세단인 C클래스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출시한다. 여기에 실구매 가격이 3,000만원대인 A클래스 신형이 나온다. 중형급 이상 세단에서 입지를 굳힌 벤츠가 중소형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셈이다. 차량 화재에 주춤했던 BMW도 내년 국내에 베스트셀링카의 신형 모델을 대거 내놓는다. BMW는 연간 1만대 이상 팔리는 엔트리 스포츠세단 ‘3시리즈’의 신형을 내년 초 국내에 출시하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X4와 X5의 신형도 발표한다. 플래그십 SUV X7도 내년 상반기 국내 시장에 상륙한다. 특히 독일 자동차 업체들은 프로모션 등을 강화해 실구매가를 내려 수요를 창출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최근 월별 수입차 1위로 등극한 아우디도 내년 콤팩트 SUV Q2와 중형 SUV Q5, 베스트셀링 중형 세단 신형 A6의 국내 도입을 검토 중이다. 최근 캠리를 앞세워 수입차 점유율 4위(6.05%)까지 오른 도요타도 물량 부족을 겪을 정도로 수입차의 수요는 견고한 상황이다.
수입차들의 대대적인 ‘안방’ 공략은 국내 완성차 업체의 내수시장 부진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 인증과 대량 리콜 사태로 최근 판매량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올해 9월까지 수입차의 누적 판매증가율은 전년 대비 13.3%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판매를) 눌러 놓은 게 이 정도”라는 말까지 나온다. 같은 기간 국산 차의 내수시장 판매율은 3.6% 감소했다. 3·4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한 현대차(-1.4%)와 기아차(-4.1%)마저 내수시장에서 흔들리는 상황이다. 앞으로 수입차들의 실구매 가격이 3,000만~4,000만원대로 낮아진다면 국내 완성차들의 주력차종이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가격으로 봤을 때 베스트셀링 모델인 SUV 싼타페와 준대형세단 그랜저에 이어 쏘나타까지 영향을 받는다. 폭스바겐의 티구안이 2년 만에 국내 시장에 빠르게 자리 잡은 것도 가격 때문이다.
내수시장마저 위축되면 완성차 업계의 수출과 생산 감소로 주문이 줄며 경영난을 겪고 있는 부품사들은 더 궁지에 몰리게 된다. 2012년 317만대에 달하던 자동차 수출은 올해 230만대 수준으로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국내 완성차 업체인 한국GM과 르노삼성조차 주요 차종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견고했던 내수시장마저 물량이 줄면 한계 상황으로 가는 부품사들이 폭증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년 자동차산업협회 상무는 “수입차는 가격이 높아 할인을 많이 할 여력이 있다”며 “반면 국산 차는 인건비 등 원가가 워낙 높아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