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3·1운동 100주년 중러 항일유적 답사기 <2> 이상설 '유허비'] 피맺힌 유해 강물에...비석만 덩그러니

한국 최초 민족학교 '서전서숙' 설립

고종 밀지 받고 헤이그 특사로 활동

"을사5적 처단" 상소후 독립운동 헌신

안중근 "의병 1만명 이상설에 못미쳐"

"시신 태워 강에 흘려보내라" 유언 따라

연해주 수이푼강에 한줌의 재로 뿌려져

이상설 선생이상설 선생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아가는 한 고려인이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인근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깊은 회한에 잠겨 있다.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아가는 한 고려인이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인근에 세워진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며 깊은 회한에 잠겨 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내 유품, 유고(遺稿)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1870~1917) 선생은 향년 47세의 일기로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다. 조국을 잃은 슬픔이 절절히 담긴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江)에 뿌려졌다. 러시아의 항일 유적 탐방을 위해 찾은 수이푼강 일대는 적막하고 허허로운 기운만 감돌고 있었다. 도시 중심가에서 4㎞ 정도 떨어진 이곳은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항일 유적 답사의 필수 코스 중 하나임에도 취재진을 안내한 고려인과 가이드 외에는 관광객 한 명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선생이 남긴 흔적을 품은 ‘유허비(遺墟碑)’만이 한쪽 구석에 외로이 솟아 있었다. 광복회(독립 유공자와 그 유족으로 구성된 단체)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지난 2001년 세운 이 비석은 폭 1m, 높이 2.5m의 직사각형 모양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정면 하단에는 선생의 업적이, 상단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은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의정부 참찬(參贊)이던 그는 1905년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던지고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조국을 떠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에 도착한 뒤 한국 최초의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수학·지리 등 근대적인 신학문을 가르치는 항일 교육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바로 다음 해 문을 닫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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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상설은 서전서숙의 설립자보다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 특사는 각국 위원들에게 대한제국 존립의 정당성을 호소했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열강들은 이 피맺힌 외침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일제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를 사칭했다”는 죄목을 들어 궐석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상설은 ‘사형수’의 신분이 된 후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해주에서 이범윤·유인석 등과 13도 의군을 결성해 의병 운동에 불을 지폈고 1914년에는 한일 병합 이후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돌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다 우수리스크(당시 지명은 니콜리스크)에서 병을 얻고 순국했다.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이상설이 대한 독립운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남긴 말을 보면 곧바로 드러난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을 앞둔 뤼순 감옥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그는 세계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라며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명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존경 어린 헌사를 바쳤다.

조국 해방의 빛줄기를 미처 보지 못하고 눈 감았던 이상설의 시신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후손들이 1966년 수이푼강변의 모래 한 줌을 퍼 와 충북 진천의 숭렬사 뒤에 있는 부인 무덤에 합장했다. 돌고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100여년 전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강은 무심하고도 의연하게 흐르고 있다.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은 “최재형과 마찬가지로 이상설 선생 역시 신앙심이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다소 세속화하면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기독교는 애국혼을 일으키는 민족 운동의 근원이었다”며 “눈보라가 치고 서리가 쳐도 당당히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후손들이 선조의 역사를 기억하며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우수리스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잡풀만 무성한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변.잡풀만 무성한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변.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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