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세계의 총리’로 불리며 유럽연합(EU)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최근 당 대표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의 정계은퇴 수순에 돌입했다. 핵심 측근조차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지난 2005년부터 총리직을 수행해온 그는 다음달 집권 기독민주연합(CDU) 당 대표직을 내려놓는 데 이어 3년 뒤 총리에서 물러난 후 어떠한 정치적 지위도 맡지 않을 예정이다.
# 최근 남미 최대국인 브라질에서 군 장교 출신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PSL)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브라질의 트럼프’를 자처해온 보우소나루는 최근 13년간 집권한 좌파 노동자당(PT)이 경기침체와 부패 스캔들에 발목이 잡힌 사이 정권을 장악해 브라질 국내는 물론 대외정책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는 당장 1일(현지시간) 브라질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외교노선을 추종할 방침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관용·다양성·인권 등의 가치가 퇴조한 지구촌에 반난민·민족주의·혐오 구호가 난무하면서 세계 정치지형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았다.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명성을 누려온 메르켈의 퇴장과 좌파의 물결이 거셌던 남미에 등장한 ‘극우’ 보우소나루라는 상징적 사건의 동시 교차는 단순한 특정국의 리더십 변화라기보다 민주주의적 가치와 다자주의적 협력을 중시하는 중도노선의 퇴조와 증오·배타주의를 앞세운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글로벌 정치 흐름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2016년 11월 이후 열린 ‘우파 포퓰리즘’ 혹은 ‘트럼피즘(Trumpism)’의 전성시대는 메르켈이 대표하는 중도적 포용의 리더십, 일명 ‘메르켈리즘’의 퇴장을 부르며 대표적 좌편향 지역이던 중남미의 리더십까지 ‘우향우’시키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전통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은 지난 10년 동안 눈에 띄게 세력을 불려왔다. 톰 올릭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수석 아시아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주요20개국(G20)의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전통적인 주류 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한 국가의 경제 비중은 2007년 83%에서 2018년 현재 32%까지 떨어진 반면 포퓰리즘 세력이 장악한 국가의 비중은 4%에서 41%로 10배 이상 커졌다. 이 같은 극적인 변화의 중심에는 2016년 등장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있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배경에는 금융위기 이후 장기화한 경제난 속에서 고조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에 더해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정서가 깔렸다는 게 공통적인 분석이다. 갈수록 커지는 경제적 양극화와 난민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주류 정치세력 대신 변방에서 과격한 목소리로 대중이 품어온 불만을 자극한 ‘아웃사이더’ 정치인들이 대안 세력으로 선택됐다는 것이다. 올릭 이코노미스트도 “이들 세력은 2008년 금융위기로 흔들린 경제와 높은 실업률, 소득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 서구 민주주의 정권들의 실패를 부각시키면서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는 유럽 정치에 가장 큰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9월 실시된 스웨덴 총선에서는 반난민을 내세운 극우 성향 정당인 스웨덴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제3당으로서 캐스팅보트를 통해 스웨덴 정국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올 4월 헝가리 총선에서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반난민·반EU를 무기로 내세워 4선에 성공했고 6월 슬로베니아 총선에서도 반난민 캠페인을 벌여온 우파 정당 슬로베니아 민주당이 제1당에 올랐다. 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보루였던 독일 메르켈 총리가 무너진 것은 이 같은 흐름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르켈 시대가 저무는 것은 서방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드는 전조이자 트럼피즘의 유럽 제패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남미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핑크타이드(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물결)’가 퇴조하며 우파의 세력에 휩쓸리고 있다. 2015년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당선을 기점으로 서서히 좌파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남미대륙은 2016년 페루 대선과 올해 파라과이·콜롬비아 대선에서 우파의 득세를 확인했다. 과도한 복지로 초래한 경제파탄과 부패에 시달려온 이들 국가는 친시장주의적 우파로 무게추를 옮겨갔다. 여기에 최근 치러진 브라질 대선은 남미가 단지 친시장적 우파로 치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단적인 보수 포퓰리즘으로 치달았다는 점에서 남미 정치의 변곡점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이 같은 포퓰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확산시키며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포퓰리즘 정당은 지난 수년간 부패한 기득권에 맞서 서민층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걸고 세계화보다 자국 우선주의를, 복잡한 정치 논쟁보다 단순한 해법을 앞세워 표심을 얻는 데 급급해왔다”며 “우파 포퓰리즘의 확산은 세계 각국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며 서로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해 결국 자기 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 포퓰리즘 정치인은 대개 강한 리더십과 신권위주의를 앞세운 ‘스트롱맨’을 표방하며 세계 정치문화에서 ‘관용’과 ‘다양성’의 설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같은 흐름은 세계대전 전후 질서에 도전하고 인류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다자주의를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사회에 커다란 위해 요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