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정권교체 이후 대법원 구성이 크게 달라지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한 대법관들의 판결 성향도 임명 대통령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된 대법관들은 대체로 보수적 판단을 견지하는 반면 문재인 정부 이후 임명된 대법관들은 진보적 판단을 앞세우는 분위기다. 법조계에서는 앞으로 현 정부 임명 대법관이 늘어날수록 대법원의 진보색은 더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文임명 대법관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몰표’=지난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현역병 입영을 거부한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증인’ 신도 오승헌(34)씨의 상고심에서 9(무죄) 대 4(유죄) 의견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창원지방법원 형사항소부로 돌려보냈다. 특히 무죄 취지로 다수의견을 낸 8명 중 김명수 대법원장과 김선수·노정희·박정화·조재연·민유숙 대법관 등 6명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들이었다. 별개의견을 낸 이동원 대법관 역시 큰 틀에서 무죄 판단은 같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대법관 7명 전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는 정당하다”는 의견을 내며 최종결론을 견인했다.
반면 보수정권 때 임명된 대법관들의 의견은 달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김소영 대법관을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조희대·박상옥·이기택 대법관 등 4명은 유죄 취지로 강경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이전 정부 임명 대법관 6명 가운데 다수의견에 동참한 대법관은 권순일·김재형 등 2명밖에 없었다. 그나마 김재형 대법관의 경우 박근혜 정부가 2016년 총선 참패 직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 동의를 의식해 임명한 호남 인사였다. 같은 사건, 같은 법률이라도 과거 정부의 대법원이 판단했다면 유죄로 끝날 수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보수정권 임명 대법관 변희재 승소 ‘올인’=최근 전원합의체 선고 가운데 임명권자에 따라 대법관들의 성향이 뚜렷하게 나뉜 판결은 또 있었다. 지난달 30일 이른바 ‘종북·주사파 명예훼손’ 사건에 대해서도 대법관들은 임명 대통령에 따라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보수논객 변희재씨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를 ‘종북’ ‘주사파’라고 표현한 것이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 살핀 상고심에서 변씨는 8(무죄) 대 5(유죄) 의견으로 사실상 승소했다. 이 과정에서 김소영·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김재형 등 보수정권이 임명한 대법관 6명은 예외 없이 변씨의 손을 들어줬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이들이 최종결론을 이끌었다.
반면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대법관 7명 가운데 박정화·민유숙·김선수·이동원·노정희 등 5명은 “변씨의 표현은 불법행위”라며 반대의견을 던졌다. 특히 민유숙·김선수·이동원·노정희 등 김명수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4명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정희 전 대표에게 유리한 의견을 내놓았다. 대법관이 좀 더 교체된 뒤 사건이 심리됐으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몰랐다는 얘기다.
박정화·노정희 대법관은 진보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 몸담았었고, 김선수 대법관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지냈다. 박정화·김선수·노정희 대법관은 모두 호남 출신이며 민유숙 대법관은 문병호 전 의원의 아내다. 공교롭게도 김소영·조희대 등 영남 출신 대법관 3명 가운데 이정희 전 대표 측 입장을 지지한 대법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반대로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 호남 출신 대법관 4명 중 유죄 의견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법관 물갈이로 진보색 짙어지는 사법부=법조계에서는 앞으로 대법관 교체가 이어질수록 대법원 전반에 진보색이 짙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보수 일색이었던 이전 정부 사법부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란 예상이다.
당장 지난 1일 마지막 ‘MB 임명’ 대법관이었던 김소영 대법관이 퇴임했다. 그 빈자리를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김상환 후보자가 채울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그는 일선 판사 시절 ‘국정원 댓글 공작’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을 맡아 법정 구속 결정을 내리고 박지만 EG 회장의 5촌 조카 살인 사건 연루 의혹 보도에 대해 주진우·김어준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 대법관이 문 대통령 임기 내 모두 퇴임한다. 2021년까지 전체 14명의 대법관 가운데 13명을 현 정부 인사로 채우게 된다. 임기가 6년인 13명의 대법관은 문 대통령 퇴임 후에도 계속 업무를 이어갈 수 있다. 해당 시점까지 남는 박근혜 정부 인사는 김재형 대법관 한 명뿐이다. 이에 따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 등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횡령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사건, 쌍용차 노조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앞으로 남은 주요 사건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권분립이 원칙임에도 정권에 따라 사법부 성향이 이렇게 바뀌는 것은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할 때도 독립적으로 권리를 행사하기보다 임명권자인 청와대와 사전 조율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았다. 대법원장만 대통령 코드에 맞추면 사법부 전체가 정권의 국정철학에 손쉽게 따라가는 구조다.
청와대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양승태 사법부는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발발 직후 법관들에게 “정치적으로 진보 판결을 내리라”는 황당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내내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협조 방안을 구상하다가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니 순식간에 사법 기조를 바꾼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지난 7월 법원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문서파일이 공개되며 알려졌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대외비 문서를 통해 “대북 문제를 제외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과감히 진보적인 판단을 내놓아야 한다”며 “(촛불집회) 금지통고 집행정지, 백남기 부검영장 발부는 매우 시의적절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