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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11점 발견

한번에 10점 이상 출토된 사례는 없어…포 사격하는 포대 유적도 함께 발견

전북 고창 무장읍성에서 나온 비격진천뢰./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연합뉴스전북 고창 무장읍성에서 나온 비격진천뢰./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연합뉴스



조선의 시한폭탄 비격진천뢰가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은 15일 무장읍성에서 발굴조사를 통해해 수혈(구덩이) 유적과 주변 퇴적토에서 비격진천뢰 11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최초의 작렬(산산이 흩어짐)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선조(재위 1567∼1608) 연간에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무쇠 재질의 원형 박 모양으로, 내부에는 화약과 쇳조각, 발화 장치인 죽통을 넣었다. 비격진천뢰를 완구라는 화포에 넣어 발사하면 목표 지점에 도착해 떨어진 다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굉음·섬광을 내면서 터져 수많은 쇳조각을 쏟아낸다. 일반적인 조선의 화포들이 대부분 성벽을 부수거나 함선을 격파하는 데 사용된 데 비해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 고유 화기 중 유일하게 목표물에 날아가 폭발하는 포탄인 점에서 국내 병기사에서 획기적인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박재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은 밝혔다. 그는 또 저서 ‘화염 조선’을 통해 중국에도 비격진천뢰와 유사한 ‘진천뢰’라는 폭탄이 있지만, 기능과 사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박 실장은 “진천뢰 내부에는 죽통이 없고, 완구로 발사하지 않아 직접 던져 터뜨려야 한다”며 “비격진천뢰는 폭발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완구로 날려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출토된 비격진천뢰는 지름 21㎝·무게 17∼18㎏으로 크기가 모두 비슷하며,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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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총 6점으로, 그중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한 점이 보물 제860호로 지정됐다. 다른 비격진천뢰는 창녕 화왕산성, 하동 고하리, 진주성 등에서 발견됐는데, 그동안 무장읍성처럼 10여 점이 한꺼번에 출토된 사례는 전무하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비격진천뢰 6점은 수혈 유적에서 나왔고, 나머지 5점은 주변 퇴적토에서 발견했다”며 “폭탄은 모두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는데, 수가 많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11점 가운데 2점은 약식 보존처리를 했는데, 폭탄 내부를 자세히 분석하면 조선시대 화포와 폭탄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가 밝혔다. 그는 “무장읍성 비격진천뢰를 제작한 시점은 명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구덩이에 폭탄을 모아놨다는 점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묻은 듯하다”며 “비격진천뢰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이 도망가면서 은닉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비격진천뢰가 나온 수혈 부근에서는 포를 쏜 시설로 짐작되는 포대 유적도 함께 발견됐다. 포대 유적은 지름 170㎝·깊이 25㎝인 원형으로, 돌을 깔아 평탄면을 조성한 뒤 흙을 다진 구조이다. 또한 남쪽에선 포를 거치하기 위해 뚫은 기둥구멍 2개도 확인됐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 훈련청과 무기창고로 보이는 건물터 유적 10여 동과 도로 시설, 자기, 기와가 출토됐다.

무장읍성은 1417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길이 1.2㎞의 성으로, 고창군이 지난 2003년 복원정비 계획을 수립한 이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까진 각종 건물터와 성벽, 문터, 해자가 확인됐다. /노진표 인턴기자 jproh93@sedaily.com

노진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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