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경찰팀 24/7] "현행법은 '강서 주차장 살인' 못막아...몇명이 더 죽어야 바뀌나요"

■'32년차' 임유경 학대예방경찰관에게 듣는 가정폭력

'물러도 너무 무른' 법이 문제

신고 들어와도 警조치 제한적

최근 3년간 가정폭력사범 중

구속된 사람은 1% 조차 안돼

'반의사불벌죄' 폐지 필요

“여자는 제 상처에 대해 해명했다. 마루에서 미끄러져 넘어졌고 거기에 우연히 가위가 세워져 있었으며 세워진 가윗날에 정확히 경부를 찔렸다고 했다.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중략) 경찰은 ‘관할지역’의 개념에 대해 내게 길게 설명하며 다친 여자가 직접 경찰서로 신고하러 올 것을 강조했다. 죽다가 살아나서도 자기 말을 바꾸는 여자가 남자를 신고하러 경찰서에 갈 리는 없으므로 경찰의 말은 무의미했다.”

임유경 수서경찰서 학대예방경찰관(APO)이 서울 강남구 일원1동 주민센터에서 주민센터 복지팀 담당 주무관과 아동학대 의심 사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송은석기자임유경 수서경찰서 학대예방경찰관(APO)이 서울 강남구 일원1동 주민센터에서 주민센터 복지팀 담당 주무관과 아동학대 의심 사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송은석기자



현관문 속에 갇힌 범죄. 지난 10월 출간된 에세이 ‘골든아워’에서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교수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상술했다. 가정폭력과 이에 따른 아동학대 예방을 주요 임무로 하는 경찰의 심정은 이 교수가 느낀 감정과 닮아 있다. 입직 32년차 경찰인 임유경(49) 서울 수서경찰서 학대예방경찰관(APO)은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가정폭력 예방 경찰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다”며 현실의 벽을 토로하고 가정범죄 종식을 위한 처벌·분리 규정 강화를 촉구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에게 위협을 느끼니까 피해자들이 112신고를 하는 거죠.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막상 ‘사건 처리를 원하시냐’고 물어보면 ‘그래도 내 가족인데’라며 (입건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폭행은 반의사불벌죄라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일시적으로 행위자를 진정시키는 일뿐입니다.”


임 경위는 “경찰관들이 가장 꺼리는 신고사건이 가정폭력”이라고 단언했다. 가정에 제공할 수 있는 뾰족한 답도 없고 눈앞에서 폭력행위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제한적이라 현장 경찰들이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게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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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물러도 너무 무른’ 법이다. 임 경위는 “경찰관이 피해자가 추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분리·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은 체포우선주의를 적용, 신고가 들어오면 가정폭력 가해자를 체포해 피해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또 경찰이 가정폭력 행위자에게 상담을 권유하는 경우 가해자가 “상담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고 나서면 도리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오히려 “경찰이 무슨 권한으로 집안일에 참견하냐”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겠다”며 협박조로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임 경위는 이 때문에 112신고가 한 가정에 특정 기간 수차례 접수될 경우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임 경위는 “가정폭력이라는 게 새로운 유형의 사건이 아닌데 대체 몇 명이나 더 죽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한 심정을 쏟아냈다.



우리나라는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이 도입되고 이듬해에는 가정폭력처벌법도 시행됐지만 법적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처럼 가정폭력으로 불거진 강력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킬 때마다 국가와 수사당국은 가정폭력 엄단을 외치지만 정작 일선 경찰관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답보 상태다. 신고율이 낮은데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로 처벌 수위도 약하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검거된 가정폭력사범 16만4,020명 중 구속된 사람은 1% 미만(1,632명)이었다.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된 경우에도 절반가량은 가해자가 보호처분도 받지 않았다. 피해자 처벌 의사와 관계없이 공소를 제기할 수 있게 하거나 상담받는 것을 조건으로 기소를 유예할 수 없게 하자는 내용의 개정안 17개는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현실적 한계가 존재하지만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적지 않다. 임 경위는 APO들의 노력으로 학대받던 아이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경우를 원동력으로 꼽았다. 지난해 11월 “박모(10)군이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담임교사의 신고를 접수한 임 경위와 수서경찰서는 박군의 집을 방문한다. 박군의 부친 박모(73)씨와 캄보디아인인 모친 A씨(33)의 집에는 두 살부터 한두 살 터울로 다섯 자녀가 물건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집안에 방치돼 있었고 아이들은 예방접종이나 치과 검진 등 기본적인 치료행위를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임 경위는 박씨에게 수차례 경찰서 출석을 요구했으나 박씨는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니 법대로 해라”며 배짱을 부렸다. 임 경위는 교육청은 물론 서울시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주민센터·구청 등 지역사회와 협업해 올 5월 가정법원에서 임시보호명령을 받아냈다. 박군과 동생들은 현재 서울의 한 보호기관으로 분리돼 심리치료와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예비 부모를 위한 부모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아동학대 전문기관의 조사(2015년)에 따르면 아동학대 가해 부모의 33.7%는 양육 태도와 방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임 경위는 “흉악범 대다수가 가정폭력 문제를 겪는 것처럼 모든 범죄의 기본이 가정 문제에서 유래한다”며 “예비 부모에게 교육을 제공해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거나 훈육을 위해서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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