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동안 기업의 시장경쟁력 확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해당 분야의 기술력이었다.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이 기업의 핵심 역량이었다.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첨단 기술을 연구·개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구·개발하고 있는 기술이 제품의 형태로 시장에 나갔을 때의 효능과 경제성이 연구·개발의 성패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제품의 유해성에 대한 고려는 적어도 연구·개발 단계에서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이렇게 시장에 나온 제품들은 깔끔하게 포장돼 대형 유통마트에 전시돼 판매되고 소비자들은 안전성에 대한 큰 의심 없이 구매해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터진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우리 사회를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 사고 이후에도 생리대 사건, 최근의 라돈 침대 사건까지 소비자 제품의 안전성은 이제 우리 사회의 큰 이슈가 됐다.
사실 의약품이나 식품 등을 제외하고 그동안 일반 소비자 제품에 포함돼 있는 화학물질의 안전성에 대한 관리는 매우 부실했다. 이러한 이유로 화학물질 규제가 강화되고 있고 이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2007년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를 실행시킨 유럽연합(EU)을 필두로 우리나라도 2015년부터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고 내년부터는 ‘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발효된다. 이제 기업은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그 제품이나 제품 안에 포함돼 있는 화학물질이 안전하다는 정보를 먼저 입증해야 된다. 환경이 무역장벽이 된 이른바 ‘No data, No market’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 무역장벽 시대에 친환경적 제품과 기술개발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 요인이 되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편리한 제품, 첨단기술을 탑재한 제품이라 할지라도 건강을 위협당하면서까지 그러한 제품을 사용하고 싶은 소비자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강화된 환경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세이프설계 (Safe-by-Design·SbD)’라는 개념이 최근 대두됐다. ‘세이프설계’는 연구·개발·기획 단계에서부터 제품이나 기술이 인체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안전한 제품을 설계한다는 개념으로 나노기술 개발 분야에 처음 도입됐다. 막대한 비용과 기간이 투입돼 개발된 기술이 환경규제로 시장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사장될 수도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개발되는 기술로 인해 야기되는 위해성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전략인 것이다. ‘세이프설계’는 그동안 일부 기업의 친환경 제품개발 전략으로 활용해온 ‘전과정평가’나 ‘녹색화학’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업의 자발적인 친환경 제품개발 전략이라면 ‘세이프설계’는 환경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러한 ‘세이프설계’는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와 강화되고 있는 국제 환경규제를 고려할 때 나노기술 분야뿐 만 아니라 신기술 개발 전반으로 확대돼 가까운 미래에 기업의 신소재 및 신기술 개발 시 필요한 보편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끊임없는 혁신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기업의 지속 가능한 혁신은 제품과 기술의 인체 및 환경 안전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때 달성될 것이며 이는 국가 주도의 규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환경에 대한 인식 확산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기업은 이러한 환경변화를 기업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또 하나의 규제로 인식하기보다는 친환경적 기업문화를 만들어 책임 있는 혁신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