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숙명여고 사태는 숙명이다

권구찬 논설위원

불공정 내신·수시 이대로 두면

전수조사 '판도라상자' 열 수도

여론눈치에 수·정시 저울질보다

대학 '독박' 쓰는 게 차라리 나아




딸의 말을 듣기 잘했다 싶다. 집에서 가까운 여고를 다니라고 했더니 굳이 먼 남녀공학을 가겠다고 했다. 내가 다닐 것도 아닌데 하고 넘어갔다. 딸이 바람대로 진학한 게 2년 전이다. 등 떠밀다 관둔 여고가 숙명여고다. 1학년 1학기 때 전교 121등과 59등 하다 1년 뒤 나란히 문·이과 전교 1등을 차지했다는 쌍둥이 자매가 딸과 동급생이다. “쌍둥이 혹시 알아.” “몰라.” 딸과의 긴 질문, 짧은 대답이 오가다 “근데 숙명뿐이겠어”라고 툭 던진 말이 뼈아프다.

내신과 학종이 공정한가에 대한 오래된 의문은 숙명여고 사태로 폭발했다. 내신뿐이 아니다. 교내 상 몰아주기 관행은 또 어떤가.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라는 알량한 자존심에 속으로 눈물 흘린 아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학생부 한 줄에 대 놓고 말할 처지도 못 된다. 대학이 자기소개서 표절을 검증한다지만 돈만 싸들고 가면 완벽한 스토리를 창작해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수시 확대가 공교육 정상화의 길이라고 믿었던 교육 당국의 케케묵은 교조주의는 그렇게 참담하게 무너졌다.

내신 비리가 이번만이 아닌데 숙명여고 사태는 유달리 주목받았다. 시험문제 유출은 해마다 두세 건 정도 발각되는데도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분노의 촛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왜일까. 드라마틱한 성적 향상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강남을 빼놓고는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112년 전통의 강남 명문고에서 발생한 사실부터 주목을 끌었다. 학부모들은 또 어떤가. 빚내서 전세살이라도 감수하는 맹모들이 아닌가. 촛불은 필연이었다. 우리 교육의 총체적 모순이 공교육과는 대척점에 있는 강남과 결합하면서 폭발력을 키웠다.


‘설마 그럴까’를 ‘그럴 수 있겠다’고 의혹을 키운 시발점이 강남 학원가라는 점도 아이러니다. 레벨 테스트 결과 3~5등급이라는 학원가 분석을 입수한 맹모들의 정보력은 촛불의 도화선이 됐다. 웬만한 고교 1등의 신상을 훤하게 꿰뚫는 ‘돼지엄마’들은 성적 미스터리를 전파하고 그를 추종하는 맹모들은 의혹을 퍼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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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숙명여고에서 터진 게 아니다. 워낙 촘촘한 눈초리에 금방 드러났을 뿐이다. 내신과 학교가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도 공교육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당국만 애써 외면했다. 빙산의 일각이라며 고교내신 비리 전수조사를 요구하는 학부모 단체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맹모들이 두 눈 부릅뜬 강남도 그럴진대 하물며 다른 곳은 어떨 까 싶다. 자녀와 같은 고교에 다니는 교사가 전국적으로 900명에 이른다. 숙명여고처럼 유혹의 담벼락 위에 있는 학교가 521곳이나 된다.

지난주 경찰 수사결과 발표 후 갖가지 의견이 쏟아진다. 혹자는 학벌 만능주의를 탓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도 대학 관문을 뚫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150만 고교생에게는 공허한 위로일 뿐이다. 내신은 믿을 수 없으니 이제라도 과거처럼 정시선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공정성이 의심받지만 수시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잠재력 발굴과 창의성 배양이라는 취지도 좋다. 그럼에도 이 사안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숙명여고 사태는 실패한 공교육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역대 정부마다 공교육 정상화를 명문으로 수시확대를 외쳐왔지만 교육 당국은 지금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학부모단체가 요구한 내신비리 전수조사, 절대 안 할 것이다.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가는 나라 전체에 무슨 경을 칠지 모른다.

이제 와서 성적 줄 세우기 정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수시가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공정성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좋은 제도라 할 수 없다.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 수시를 이대로 둔다면 판도라의 상자를 실제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 수시로 기울어진 운동장도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론이 무서워 이도 저도 못하겠다면 차라리 학생선발권을 대학에 전부 위임하든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정시를 저울질하다 오락가락하기보다는 대학이 독박 쓰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chans@sedaily.com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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