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종목·투자전략

[시그널 Deal Maker] 계약서에 담긴 시대상

■정경호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정경호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정경호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인수합병(M&A) 계약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항 중 하나는 ‘진술과 보장(Representation and Warranty)’이다.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체계 국가에서 기원한 조항은 아니고 영미법체계 국가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영미법체계 계약서 양식이 전 세계에 걸쳐 보편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빠질 수 없는 계약 조항이 되었다.

진술과 보장은 일방 당사자가 중요 사항을 상대방에게 진술하고 그 진술이 틀림없으니 안심하라고 보장하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예컨대 “회사에 숨겨진 부외 부채는 없다”, “회사를 상대로 제기된 송사는 없다”는 식으로 상대방이 불안감을 가질 만한 항목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진술하고 보장하는 식이다. 진술한 내용이 나중에 허위로 밝혀지면 각종 패널티 조항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거래당사자들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진술과 보장을 받아내거나 자기의 진술과 보장 범위를 줄이려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 계약서에 반영된 진술과 보장에 그 시대의 일면이 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노무 관련 진술과 보장은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껏해야 임금체불같은 문제일 테니 수백억원짜리 거래를 하면서 조금은 등한시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른바 통상임금 문제가 온 국민의 주목을 받은 다음부터는 이를 포함해서 장황하게 작성된 노무 관련 진술과 보장을 보는 것이 일반화됐다. 개인정보 보호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진술과 보장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었는데 이제는 별도 조항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뀐 데다 정보 유출로 기업들이 몇 차례 집단소송을 겪은 후부터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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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국제정세를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거래상대방인 미국 회사가 당시에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의 내용을 모두 숙지하고 있다는 진술과 보장을 요구해 왔을 때는 굉장히 황당했다. 미국이 자국법인 FCPA를 해외에 확대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일한 초강대국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비교적 최근에 경험한 사례를 소개한다. A 기업에 투자를 검토 중이던 의뢰인은 기업 오너가 업계에서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하다는 소문에 걱정이 됐다. 오너를 상대로 과거 어떠한 ‘갑질’도 행한 적이 없다는 진술과 보장을 요구했다. 사회 전체가 이른바 갑질에 몹시 민감한 분위기인데 혹시나 투자이후 이런 사실이 밝혀져 회사가 타격을 입거나 상장을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오너는 당연히 펄펄 뛰었다. 도대체 어디까지를 갑질로 봐야 하느냐, 업무실수를 저지른 직원을 질책한 것도 갑질이냐, 갑질을 해서 지탄을 받아도 내가 받지 회사가 받느냐, 잘못된 언론 보도로 문제가 된 경우는 어떻게 처리 할것이냐 등.

솔직히 필자도 갑질에 관한 진술과 보장까지 넣고 싶지는 않았다. 갑질이란 단어가 표준어도 아닌데 촌스럽게 ‘아무개는 갑질을 한 적이 없다’는 문구를 계약서에 넣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의뢰인의 입장도 이해는 갔던 터라 회사의 명성과 재산에 손해를 입힐 만한 불법행위와 형사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내용으로 조율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갑질에 대한 진술과 보장을 작성한 사람이 과연 필자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전파 가능성이 무척 높다. 외국에서 들여온 진술과 보장이 그 사용빈도를 높여가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보편화된 것처럼 갑질을 한 적이 없다는 진술과 보장도 여기저기로 퍼져나가서 어느새 표준적인 계약조항으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닐지. 찍어내듯 매번 들어가는 조항을 ‘표준문항(Boiler Plate)’라고 하는데 한번 표준문항이 되면 여간해서 빼기가 어렵다. 그 자체로 시대의 작은 유산이 된다고나 할까. 길고 긴 진술과 보장 조항을 두고 오늘도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지만 어쩌면 필자는 이 시대의 작은 유산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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