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케르치해협




제정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절정에 이르렀던 1787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점령지 크림반도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총독인 그리고리 포템킨의 귀에 들어갔다. 포템킨은 궁핍한 점령지를 감추기 위해 거대한 그림판으로 만든 화려한 가짜 마을을 급조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제의 환심을 산 포템킨은 승승장구했다. 크림반도 남부 세바스토폴에 흑해함대를 창설한 사람이 포템킨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포템킨 빌리지’는 현대에 이르러 전시행정의 대명사로 통한다.

지중해를 거쳐 흑해로 들어서면 북쪽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아조프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크림반도로 사면이 둘러싸인 아조프해는 평균 수심이 10m도 채 되지 않는 얕은 내만(內灣)으로 경상도보다 약간 크다. 흑해에서 아조프해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 케르치해협이다. 해협 서쪽이 나이팅게일을 낳은 크림전쟁의 주 무대 크림반도이고 동쪽이 러시아 영토다.


이 해협은 길이 41㎞에 좁은 곳의 폭이 고작 4㎞밖에 안 돼 배를 타고 쉽게 건너갈 수 있다. 두 바다를 잇는 유일한 수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여서 고대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흑해를 건너 식민도시를 세운 후 로마와 훈족, 몽골, 오스만, 제정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숱한 지배자들이 명멸했다. 현재의 지명 케르치는 14세기 지중해의 해상강국 베네치아가 해협 일대를 장악하고 쌓은 ‘성곽(체르키아·cerchia)’이라는 이탈리아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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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치해협에 분쟁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가 해협을 통과하던 우크라이나 함정 3척을 나포하자 우크라이나 정부가 그제 계엄령을 선포했다. 양국이 공동 수역으로 관리하기로 협정을 맺었지만 러시아가 4년 전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를 점령한 후 독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해협을 사실상 봉쇄했다. 아조프해를 러시아 내해로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숨통을 죄겠다는 전략이다. 이곳이 막히면 우크라이나가 자랑하는 도네츠 탄광지대를 기반으로 하는 석탄과 철광석은 물론 밀의 해상 수송로가 차단된다. 서방 진영이 러시아 견제에 나서 함정 나포 사건이 동서대결로 비화할 조짐도 엿보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오스만이 우크라이나로 달라졌을 뿐 대결구도는 160여 년 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한 크림전쟁과 복사판이다. ‘21세기 짜르’로 불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려는 듯해 우려스럽다. /권구찬 논설위원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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