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여직원이 따로 찾아와 월 소득이 100만원이나 줄어 애들 학원을 끊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다른 직원에게는 비밀로 할 테니 초과근무를 할 수 있게 꼭 도와달라고 애원하더군요. 사장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기업 오너가 총리를 만나기 전 본지에 쏟아낸 하소연이다.
뭉텅이 한숨과 눅진한 토로가 귓가를 울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기업인들이 4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이낙연 총리와 막걸리를 곁들인 만찬을 한다기에 오전부터 미리 전화를 돌려봤다. 그들의 경영상 고충과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건설 업체를 경영하는 A 회장도 장탄식을 했다. 그는 “중견기업의 경우 300인이 넘어가면 여러 가지 규제가 한꺼번에 겹쳐 경영 상황이 급속히 어려워진다”며 “종업원이 300명에 다가서면 기업들은 어떻게든 고용을 줄이려고 희망퇴직까지 받는다”고 말했다. 정부 정책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따끔한 지적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인원 수를 기준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자리 창출을 잘하는 기업에 더 많은 혜택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그러면 기업들이 앞다퉈 고용을 늘릴 것이고 자연히 국가 경제도 잘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 총리는 이날 저녁 총리공관으로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을 비롯해 회장단 14명을 초청해 막걸리 회동을 가졌다.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은 이 총리는 모두발언에서 “중견기업인들의 건의와 애로 사항을 경청하고 최근 경영 현황에 대한 경험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며 “정책에 반영할 것이 있으면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리의 발언은 정제돼 있었다. 기업인들은 격한 표현을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일부는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 총리에게 경제정책에 대해 죽비 같은 쓴소리를 쏟아내기도 했다. 특히 현장과 따로 노는 정책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한 중견기업인은 본지에 “주 60시간 넘게 일하던 직원들은 근로시간 단축 시행 이후 월급이 평균 70만~80만원이나 줄었다고 아우성”이라며 “워라밸을 정착시키는 사회 분위기도 존중해야 하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받고 초과근무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보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 업체를 경영하는 한 회장은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노무비가 오르면 제품 값이 오르고, 당연히 수출이 안 된다”면서 “다른 나라는 뛰고 있는데 우리는 손발이 꽁꽁 묶인 신세”라고 토로했다.
속도가 더딘 규제 완화에 대한 답답함도 드러냈다. 한 기업인은 “상법·공정거래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새 정부의 규제혁신 방침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직원들과 가족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우리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이 총리 앞에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문재인 정부의 친노동정책에 따른 어려움을 나타내는가 하면 자동차·조선·해운 등 기간 산업 위축으로 야기된 협력업체의 경영난도 호소했다.
강 회장은 “올 상반기 은행권 이자수입이 20조원에 육박한다고 하더라”며 “금융권이 조금 더 유연한 태도로 기업을 대하고 산업 발전의 기틀이 될 수 있도록 총리께서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말했다.
막걸리 회동에 앞서 서울경제신문은 초청받은 중견기업인 14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기업인들의 애환과 고충을 들었다. ‘이념의 틀’에 안간힘을 쓰며 현실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사전 인터뷰에서는 총리 앞에서는 털어놓기 힘든 현장의 목소리가 그대로 배어났다. 친노동정책의 애꿎은 희생양이 되고 있는 기업인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노동정책 문제 많아, 부작용이 더 커”=서비스 분야 업체를 경영하는 B 회장은 “새로운 노동정책은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동시에 낳는 만큼 조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라 잔업과 특근을 하지 못해 소득이 줄어든 직원들이 많아 사업주 입장이 난처해졌다는 얘기다. 그는 “청소나 경비·케이터링 등 임금 규모가 작은 직종의 경우에는 잔업과 특근을 못하면 월급이 크게 줄어든다”면서 “직원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며 초과근무를 자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무조건 법규나 제도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움직일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중견기업은 주력 산업에 포진한 대기업의 1~2차 협력업체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주력 산업인 조선·해양플랜트에 이어 자동차와 휴대폰까지 위기에 처하면서 협력업체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자동차 부품 분야의 C 회장은 “완성차 업체가 어떤 차종을 몇만대 생산하겠다고 계획을 세우면 1~3차 벤더들이 그 규모에 맞춰 투자를 하는 게 국내 자동차 부품 생태계의 방식”이라면서 “실컷 투자는 해놓은 상태에서 완성차가 팔리지 않고 부품 수요가 줄고 있는 만큼 정부가 전체 산업을 바라보고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인들의 애환을 직접 들은 이 총리는 “중견기업이 기술혁신·경영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리는 등 어려운 경제여건을 극복했다”며 “앞으로도 중견기업이 앞장서 어려움을 헤쳐나가 우리나라 산업의 희망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일부 업종은 회계기준 변경해야=또 다른 자동차 부품 분야 D 회장은 “한국 자동차 산업은 펀더멘털이 좋아 정부가 조금만 도와주면 금방 살아날 수 있다”면서 “경쟁력이 충분한 만큼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해운 분야의 E 회장은 회계기준을 바꿔줘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선사들이 배를 살 때 보통 10%는 자기자본을 쓰고 나머지 90%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일으키는데 이 90%를 장부상 부채로 잡으니 부채비율이 커지고 부실기업으로 보이게 된다”면서 “이런 점 때문에 배를 사지 않고 임대선박으로 선단을 짜게 돼 효율이 낮다”고 말했다. E 회장은 “국내 조선 산업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회계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이 어려울 때 금융이 제 역할을 해야”=중견기업인들은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금융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동차 분야의 한 참석자는 “가장 중요한 게 금융”이라면서 “대출 상환기간이 돌아오면 업종 전반이 어렵다는 이유로 연장을 안 해주고 일부 상환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비 오는데 우산 뺏지 말라는 얘기를 매일 했는데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이 참석자는 “신규 자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연장해달라는 것까지 거부해 한 회사를 순간적으로 어렵게 하는 금융기관이 많다”면서 “기업인들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우지만 실상 이 나라를 위해 애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기계 분야의 F 회장은 “특정 업종의 업황이 나빠지면 협력업체들은 재무구조가 나쁜 가운데서도 투자를 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면서 “결국 기업이 위기를 탈출하려면 금융기관이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역할을 꺼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금융기관들은 ‘어려운 회사를 지원했다가 잘못되면 장관이 책임져주느냐’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이래서는 투자와 일자리 모두 늘어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맹준호·박우인기자 nex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