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EU “韓, ILO 핵심협약 비준 의무 미뤄”…사상 첫 분쟁 해결절차 개시

검토 거쳐 권고·조언 등 결정 전망

권고 거부해도 관세 부과 등 경제

제재 없어…‘국가 위상 실추’는 우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양측 정부 간 협의 절차를 공식 요청했다고 17일(현지시간) 밝혔다. EU가 ‘분쟁 해결절차 개시’로 규정된 정부간 협의 절차에 착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EU 행정부격인 집행위의 이번 조치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포함된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 장(章·Chapter)에서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해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할 수 있도록 분쟁 해결절차를 규정한 데 따른 것이다.


지난 2011년 7월 발효한 한-EU FTA는 노동 문제와 관련해 △1998년 ILO 기본권 선언 상의 노동기본권 원칙을 국내 법·관행에서 존중·증진·실현할 것△ILO 핵심협약과 그 외 최신 협약 비준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할 것 등을 의무로 규정했다. 한국은 1991년 ILO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하지만 ILO 전체 협약 189개 가운데 29개만 비준한 상태다. 특히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협약)를 비롯해 29호(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105호(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 등 핵심협약 8개 중 4개는 비준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는 노조할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는 87호를 비롯한 핵심 협약의 ‘무조건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EU는 한-EU FTA에서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 장을 처음으로 넣은 뒤 캐나다, 싱가포르, 일본, 베트남 등과 체결한 FTA에도 모두 포함시켰다. EU가 이를 근거로 정부 간 협의 절차를 공식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U는 그동안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 압박을 강화해왔다. 2013년 5월에는 EU 내 노동·기업·환경단체 등 시민사회대표로 구성된 자문단이 유럽의회와 집행위에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에 대해 감독을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표했다.올해 4월 서울에서 열린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 6차 회의에서도 EU측은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에 진전이 없는 것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당시 EU는 한국 정부에 관련 일정을 상세히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가시적 진전이 없을 경우 분쟁 해결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밖에도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지난 9월13일 고용노동부 장관에 서한을 보내 “ILO 협약 비준과 관련해 가시적인 진전이 없을 경우 분쟁 해결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고 재차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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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가 한국 정부에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함에 따라 한국은 EU 측과 실무협의에 응해야 한다. 실무협의에서 결론을 못내 추가 논의가 필요하면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소집해야 하고, 여기서도 90일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전문가 패널을 2개월 내 구성해야 한다. 패널은 90일 이내에 보고서를 마련해 해결방안을 권고 또는 조언한다.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위원회에서 향후 패널의 권고 및 조언 이행에 대해 점검하게 된다. 정부는 내년 1월 협의를 시작하면 마지막 절차까지 8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본다.

분쟁 해결절차가 시작된 이후 한국 정부가 계속 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룬다고 하더라도 EU는 특혜관세 철폐나 금전적 배상의무 등 경제적 제재를 부과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이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노동 후진국’으로 평가돼 국가적 위상 실추가 뒤따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사태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둘러싼 국제적 압박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많다. 고용노동부는 “국내 기업이 노동에 대한 기대 규범 수준이 높은 유럽 국가로 상품을 수출하는 데도 노동기본권을 다루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이 체결한 FTA 16개 가운데 9개가 이미 노동 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현재 FTA 협상을 진행 중인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포함한 남미 국가 중에도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곳은 브라질밖에 없다는 게 고용부 설명이다.

반면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이에 따른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산업 현장에서 노조의 힘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논의하는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들이 지난달 20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법 개정 권고안을 발표했을 때도 경영계는 강력히 반발했다.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더라도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경영계는 노사관계 개선위원회에서 단체협약 유효 기간 확대, 부당노동행위의 형사 처벌 제외, 직장 점거 파업 금지, 대체근로 허용 등 파업 제한 규정을 요구 사항으로 제출했고 현재 이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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