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서 자동차부품 업체 B사를 경영하는 안진규(가명) 대표는 최근 감사를 맡아왔던 회계법인에 비밀리에 매각을 의뢰했다. 안 대표는 “연 매출이 1,200억원에 달하며 나름 튼실한 기업으로 성장시켰지만 원청업체의 실적이 나빠지면서 매출이 크게 줄었다”며 “최저임금 인상에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경영여건이 더욱 나빠지고 있어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30년간 내 청춘을 다 바친 곳인데 팔겠다는 심정이 오죽하겠냐”며 “당장 5년 후, 10년 후도 기약하기 힘든 게 자동차부품업종인데 더 끌고 가다가는 그나마 모은 재산까지 날릴 판”이라고 말했다. 중견 건설업체 C사는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다. 이 회사는 최근 관급공사 등을 주로 맡았던 건축시공 부문을 매각하고 대신 프로젝트파이낸싱(PF)만 전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시공 부문을 매각하면서 전체 임직원이 53명에서 5명으로 크게 줄었다. 김창진(가명) 대표는 “건설경기가 호황을 지나 침체로 가고 있다는 판단 아래 30년 가까이 해왔던 시공 부문을 과감하게 접고 부가가치가 높은 금융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공은 현장업무를 위해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하는 인력이 많았는데 금융으로 오니 인건비 부담이 확실히 낮아졌다”며 “시장 상황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게끔 몸집을 줄인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고 자평했다.
우리 경제의 허리를 담당했던 제조 중견·중소기업들이 희망을 잃고 사업까지 접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계는 대부분 주력업종에 포진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협력업체들이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구조여서 자동차·전자·조선 등 주력업종의 대기업들이 휘청이면서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이다. 특히 자동차 업계의 경우 전기차·수소차 등 친환경 자동차가 신성장동력으로 부상하면서 엔진 기반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부품업체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국내 완성차 업계는 미국·중국 등 주력시장에서의 실적 부진, 중국의 사드(THAAD) 보복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상장 부품사 가운데 약 30%가 올 상반기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업황이 나빠졌다.
인수합병(M&A) 업무를 취급하는 자문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동차부품 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체들이 매물로 쏟아져나오는데 예년과 비교해도 30% 이상 늘어난 규모”라며 “예년보다 매물로 나오는 기업 수 자체는 늘고 있지만 막상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는 실정”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과거에는 매출이 안정적으로 나오는 중견기업의 경우 승계 이슈가 아닌 이상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낮았다”며 “최근에는 기업가치를 많이 내려 팔려고 나서지만 사려는 이들이 투자를 꺼려한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제조업 전반에서 쉽게 감지된다. 연 매출 5,000억원 규모의 자동차부품 업체를 운영하는 최우현(가명) 대표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 모두 쉬쉬하지만 예년에 비해 확실히 매물이 많이 나와 있다”며 “경기도 안 좋고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지니 기업을 이끌어 갈 자신이 없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우리 회사도 산다는 사람이 있으면 팔아버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그 가능성에 투자해야 하는데 제조업 분야는 아예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고 기대할 것 역시 없다”고 말했다. 산업용 공구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최진명(가명) 대표는 “자동차부품 업체들의 경우 앞으로 전기차로 변화되면서 매물이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자동차의 생명은 엔진인데 전기차는 엔진이 없지 않나. 특히 전기차는 들어가는 부품이 기존 차량 대비 줄어들기 때문에 자동차부품 업체들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매수자 입장에서도 매물은 늘었지만 구매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연 매출 8,000억원 규모의 중견기업 오너인 이수혁(가명) 회장은 “부동산 매각을 통해 확보한 1,000억원의 현금을 갖고 적당한 매물을 찾아 나섰지만 지난 6개월 동안 마음에 드는 회사를 찾지 못했다”면서 “M&A 거래를 중개하는 대형 회계법인을 통해 40건 정도의 매물을 소개받았는데 90% 이상이 자동차나 전자부품으로, 굳이 구매하고 싶지 않은 업종이었다”고 말했다. M&A 거래를 중개하는 회계법인 관계자들도 부품업체의 경우 매물로 나와봤자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조선 등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제품을 생산·공급하는 1~ 2차 벤더들의 경우 시장 전망 자체가 어두운 상황이라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전기전자나 화학·기초소재 분야의 경우 드물게 매각이 이뤄지면서 M&A 시장의 숨통이 일부 트이고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회계법인의 한 고위관계자는 “제조업 전반에서 기업 매물이 예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매각 딜이 성사되지 않는 것은 매물을 내놓은 측과 사려는 측의 의견차가 크기 때문”이라며 “매수를 원하는 쪽은 리스크 헤지가 가능한 안전장치를 걸어두고자 옵션 조항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보장 수익을 요구하는 ‘다운사이드 프로텍션(downside protection)’을 걸거나 구조조정 펀드 등에 투자하기를 원하지 법인 자체를 사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설령 협상 테이블에 앉아도 기업가치가 오너의 예상보다 크게 떨어지면서 딜이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나 전자의 경우 수요독점 구조이기 때문에 협력업체들이 (대기업과의) 전속거래 구조를 끊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며 “과거에 잘나갈 때는 협력업체들이 함께 갈 수 있지만 지금은 완성차 상황이 좋지 않은데다 이대로 가다가는 버티기 어렵다는 위기감에 ‘리스크 헤지’ 차원에서 매물이 쏟아지는 것”이라고 짚었다. 송창석 숭실대 교수는 “국내 제조업체들의 경우 전속거래 비중이 높다 보니 대기업 실적이 부진하면 연쇄적으로 수익성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단기적으로는 대기업이 잘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부품 업계 사업장의 다변화를 도모하는 등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수민·심우일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