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30년이 지났어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정헌의 ‘1996년에 대한 희미한 기억들’에서 분진 마스크와 안전모를 쓰고 갱도로 향하는 젊은 노동자의 모습은 지난달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연료 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세상을 등진 하청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면발처럼 꼬인 세상, 캄캄한 밤 같은 나날 속에서도 빛나는 별을 꿈꾸고 소나무와 구름을 그리는 삶도 마찬가지. 햄버거로 상징되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도 여전하다. 왼쪽 하단의 김정일 초상화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바뀌었더라면 2019년작이라 해도 깜빡 속을 만하다.
화가 김정헌은 이 그림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민예총) 30주년 기금마련전에 내놓았다. 오는 6일까지 종로구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리는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 전시다. 지난 1988년 12월 23일 창립된 민예총은 민족예술을 지향하는 진보적 성향의 문학·미술·공연 예술가들로 이뤄진 단체다. 이번 전시에는 박생광 등 작고작가를 포함한 42명이 참여해 3개층 전시장을 채웠다.
1988년작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를 통해 하나 되기를 주장하면서도 분열된 현실을 꼬집었던 신학철은 최근작 유화 ‘유체 이탈’에서도 일관된 목소리를 낸다. 코가 바라보는 방향과 눈이 응시하는 쪽과 말을 내뱉는 혀가 제각각인 자아 분열의 시대상을 풍자했다.
사회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작가들의 태도나 변한 것 없는 세상은 그대로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들 작품이 ‘민중미술’로 분류되며 시장의 새삼스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 곱고 평온한 이미지의 작품은 아니지만 처절하고도 노골적인 풍자가 한국 근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중국의 경우 정치 격변기에 나타난 현대미술에 향토적 사실주의와 사회사적 관심이 교차해 ‘정치팝’ ‘차이나 아방가르드’로 불리며 상업적 성공까지 거둔 사례가 있다.
청와대 본관에 걸린 촛불집회 소재의 ‘광장에,서’로 유명한 임옥상의 가로 325.5㎝의 대작 ‘땅’은 속살까지 내준 채 공사 중인 풍경이지만 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희미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판화가 이철수의 연작판화 200점인 ‘네가 그 봄꽃 소식해라’ 등 귀한 작품도 볼 수 있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당시 평화의집에 걸렸던 ‘북한산’의 작가 민정기, 전쟁의 아픔을 붓으로 쓰다듬은 송창, 농촌의 현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린 이종구를 비롯해 제주 4·3사건을 다룬 그림으로 유명한 강요배의 ‘홍도’ 등이 선보였다.
아이 업은 늙은 할머니 뒤로 단발머리 소녀를 드리운 조각가 안경진의 ‘업보’부터 일상의 소재로 날카롭고 이미지를 그리는 박불똥의 ‘갑의 미소’까지 서정과 냉소를 두루 아우른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