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2019 신년기획] "'남 따라하는 과학' 구태 여전…퍼스트무버 전략 못세워"

■신년 인터뷰-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

과학자에 100% 자율성 주고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성과

R&D지원 땐 美HHMI처럼 논문·특허보다 동료 평가로 선정

5년 뒤 삼성서 지원받는 900곳 중 20곳은 노벨상 손색 없어

/대담=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앞으로 5년 뒤 삼성에서 지원받는 연구실이 총 900여개가 될 텐데 이 중 30~50곳은 사업화에 크게 성공하고 20여곳은 노벨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국양(66·사진)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서초동 사무실과 율곡로 서울경제신문 본사에서 ‘신년 인터뷰’를 갖고 “성공 확률이 낮은 힘든 과제를 가지고 온 과학자에게 국내외 전문가의 블라인드 평가를 거쳐 완벽한 자율성을 부여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박사인 그는 AT&T벨연구소에서 10년 이상 연구하다 모교인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로 옮겨 지난해까지 근무했다. 지난 2013년 고교 친구인 최양희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등과 함께 재단 설립을 주도했고 최 교수가 2014년 6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되자 이사장 바통을 넘겨받았다.

“당시 최지성 부회장으로부터 ‘마음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브레인스토밍 끝에 ‘정부가 못하는 것과 독특한 것을 맘껏 연구하게 만들자’고 정했죠. 기초과학, 소재기술, 정보통신기술(ICT) 창의과제를 지원하는데 과학자에게 ‘정부 연구개발(R&D) 자금으로는 못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못 박았어요. 기초과학의 새 방향을 제시하고 정말 팔릴 수 있는 소재나 ICT 과제를 내라는 것이죠.” 독창적인 선도 연구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연구, 인문·사회·예술·공학·자연과학 융합 연구를 하라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그가 재단과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센터 통합운영위원장으로서 지난 5년간 총 466개 연구실(이 중 재단 지원은 164곳)에 지원한 돈은 6,000억원. 앞으로 9,000억원을 5년간 추가 선정해 10년간 지원할 예정이다.

재단은 연구 기획·선정·평가 과정에서 과학자의 자율성을 무조건 존중한다. 우선 지원자로부터 두 쪽짜리 기획안을 받아 국내 평가를 해 10%가량 합격자를 추려 영어로 이십 쪽 기획안과 동영상을 찍도록 해 미국에서 심사한다. 심사위원단은 지원자의 인적사항을 볼 수 없고 국내는 1박 2일, 미국은 온종일 토론해 독창성과 잠재력 등을 판단한다. 상당한 심사비를 주되 만약 특정인을 미는 기미가 있으면 다음 심사에 초청하지 않는다. 연 6만1,000건(2016년 기준)이 넘는 20조원 규모의 국가 R&D 과제가 비전문가가 적지 않게 포함된 심사위원단에서 별 준비 없이 선정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남을 따라가는 것이나 지도교수나 박사후연구원(포닥) 아이디어면 절대 뽑지 말라’고 주문하죠. 미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심사위원단에 들어 있는데 일부 교수는 ‘미국도 하지 못하는 시도라 분명히 뭔가 나올 것’이라고 말해요. 처음 3년은 결과가 덜 나와 초조했는데 이제는 무르익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네요. 독특하게 나가는 데서 보상이 클 것이라고 봐요.”

그는 “(대학 등에 국가 R&D비를 집행하는) 한국연구재단의 2중대가 되지 말자는 생각”이라며 “논문이나 특허 등 정량평가보다는 학계의 동료평가를 많이 본다”고 힘줘 말했다.

재단의 롤모델로는 항공기 사업 등으로 거부가 된 미국의 고(故) 하워드 휴스의 하워드휴스메디컬인스티튜트(HHMI)를 꼽았다. “생명과학 분야만 지원하는 이곳은 연구비는 물론 대학에서 받던 연봉과 그 연봉의 30%까지 지원하죠. 5년간 과학자는 자율적으로 쓰고 HHMI는 장비와 재료 구매 등을 지원합니다. 대학은 교수에게 봉급을 주지 않는 대신 연구년을 더 주죠. 이러니 34명이 노벨상을 받았지요.” 컴퓨터로 돈을 번 고든 무어가 만든 고든앤드베티무어재단과 하버드대 등의 수학과 교수를 하다 헤지펀드로 거부가 된 제임스 사이먼스가 만든 사이먼스재단도 참고 사례로 들었다.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R&D 혁신방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이호재기자.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R&D 혁신방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이호재기자.



과학자는 기초과학의 경우 연 4억~5억원씩 5년을 지원받는다. 개발과제 지원은 3년짜리가 많다. HHMI처럼 연봉까지 주지는 않아도 연봉의 최대 30%를 추가 인건비로 지급한다. 지방대 등 우수과학자가 대학원생이나 포닥이 없어 겪는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그들의 인건비 절반을 지원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2018학년도에 서울대마저 이공대에서 대학원생이 미달된 현실에서 현장 눈높이에 맞는 지원책이다.


“5년간 지원한 과학자 중 20%가량을 5년 추가지원자로 재선정했습니다. 사이언스나 네이처 논문이나 특허를 많이 냈다고 준 게 아닙니다. ‘이 과학자가 학계에서 인정받는 일을 하고 있느냐’ 질을 따지죠. 과학자가 굉장히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요.”

관련기사



국가 R&D 과제처럼 과학자가 매년 평가받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논문이나 특허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단 연 1회 1박 2일 발표회에 참석해 보안 서약서를 쓰고 있는 그대로 발표하고 고민을 털어놓으면 된다. 보고서는 지원이 끝날 때 한 번만 내면 된다. 그는 “재단 피디가 연 2회 연구실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하고 애로를 해결한다”며 “소장학자가 국제 인지도를 높이도록 미국 무어재단과 공동학회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가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5년간 단 한 곳이 사업화에 성공했고 4~5곳이 사업화를 추진하는 수준이지만 채근하지 않는다. “그만큼 성과를 독촉하지 않고 믿고 기다리죠. 정량적인 업적보다 세계적 학자가 되거나 진짜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화에 성공하도록 지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지원 성공률은 20~30%로 잡되 학술적이든, 사업이든 대박을 낼 확률은 4~5%는 되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기대다.

사업화 단계에서는 질적으로 우수한 국제특허를 내는 데 도움을 준다. 주먹구구식인 대학의 지적재산권 관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해외에 기술을 팔거나 삼성전자나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소개해준다. 그는 “466곳 중 정부출연연은 9곳이고 중소·벤처기업은 참여를 독려해도 제안서의 질이 떨어져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미국 R&D 풍토와 우리 현실을 대비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은 연구비를 받는 것이 정말 힘들어 전쟁이에요. 하지만 철저하게 연구자 중심으로 운영하죠. 노벨상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가끔 500만달러 과제를 내는데 그때는 아예 전문성 있는 직원이 연구실에 상주합니다. 연구 계획부터 노벨상이라든지 어떻게 좋은 기술을 낼 수 있는지 체계적으로 디테일하게 관리하죠.” 이에 비하면 한국연구재단이든, 대학 산학협력단이든 국내 연구행정의 전문성은 상당히 떨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벨에 있다 한국에 왔을 때 연구비를 받고 팔로업하는 게 상대적으로 쉽더라. 서울대에서 정년 때는 연 6억원씩 지원받았다”며 “정부와 국가 연구비 집행기관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국가 R&D 시스템은 1990년대나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조심스럽다’면서도 정부와 대학에 대해서도 고언을 했다. 그는 “정부가 ‘뒤쫓아가는 과학 그만합시다’ 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하고 있다”며 “바둑처럼 남을 뒤쫓아가면 성공할 수 없다”고 힘줘 말했다. 인공지능(AI)이 핫이슈가 되면 정부는 미국 등 과학 선진국처럼 AI 그다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육성과제를 보면 ‘몇 년 전에 나왔어야 하는데’ 라는 아쉬움이 들죠. 패스트팔로어 전략으로 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 고유의 과학기술이 뭐냐’고 하면 곤혹스러울 텐데 여전히 퍼스트무버 전략으로 탈바꿈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1990년대부터 국가 R&D비를 크게 늘려온 정부가 ‘이제는 국민에 답해야 할 때’라며 서두르다 허둥댄다”며 “과학정책 수립과 평가 과정에 파격적 발상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통로를 마련하고 현실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학자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학에 대해서도 “외국에 비해 성과가 형편없이 떨어진다”며 “연간 특허수입이 뉴질랜드 오클랜드대가 2,000억원가량, 중국 칭화대와 베이징대가 2,000억~3,000억원인데 서울대는 100억원 정도, KAIST는 80억원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지난해부터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연구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는 연구부정에 대해서도 해법을 내놓았다. “연구자가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는데 95%는 괜찮은데 5%가 부패했다고 봐요. 저희는 466곳 중 5~6곳을 샘플로 회계법인 감사를 해 부정이 포착되면 미국처럼 소속 기관에 불이익을 줍니다. 대학에 전화해 그쪽 지원 대상 교수를 줄이겠다고 하고 세 번째는 아예 그쪽은 안 뽑는 것이죠.” 그 결과 대학에서 신경을 쓰게 돼 지난 5년간 연구부정과 관련해 단 한 건의 경미한 사례만 있었다는 게 그의 설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R&D 혁신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이호재기자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R&D 혁신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이호재기자


명이다. 그는 “미국은 연구부정이 발생하면 미국국립과학재단(NSF)이 대학에 간접비(60%) 감축이라는 페널티를 부과한다”며 “대학도 고의적인 연구부정을 저지른 교수를 대부분 교수를 파직시키고 사기죄로 고소한다”고 소개했다.

한편 그는 “사회가 활력이 떨어져 위기감이 드는데 정치인이나 공무원 모두 진취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미국·유럽처럼 여성 참여를 늘리고 이민에 대해서도 조금 더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고광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