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사상 초유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검찰 소환은 정권 교체 후 사법부의 달라진 권력 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로 출범한 진보 정권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 내의 적지 않은 반대에도 사법부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밀어붙였다. 결국 김 대법원장의 전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불려 나와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이번 양 전 대법원장 소환은 검찰과 법원의 조직 논리를 앞세운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의 성격도 강하다. 검찰이 사법부의 핵심을 겨냥해 전방위 수사에 나선 것은 사상 처음이며 이 과정에서 검찰의 먼지떨이식 수사에 대한 사법부의 불만도 높아지는 모양새다. 수사 결과에 따라 검찰과 법원 중 한쪽은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적폐청산과 사법부 주류 교체 맞물린 ‘결정판’=법조계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검찰 소환이 결국 ‘법원판 적폐청산’의 결정판이라고 진단했다. 정권 교체에 따라 사법부 지도부까지 진보 성향 판사들이 약진하면서 현 정권의 박근혜 정부 적폐청산에 대한 의지와 법원 내 주류 교체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사법농단 의혹의 시작은 탄핵 정국이 한창이던 지난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로 발령된 이탄희 판사가 원소속인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으로 복귀하면서 불거졌다. 이 판사가 “행정처 컴퓨터에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 등의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됐다. 양승태 사법부에서 진행된 1차 진상조사는 핵심증거인 행정처 컴퓨터도 조사하지 않은 채 2017년 6월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양 전 대법원장 후임으로 진보 성향의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명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의 상당수가 재경법원과 법원행정처로 대거 배치됐고 대법관에도 진보 성향 인사들이 상당수 합류했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진행된 2차 조사에서는 행정처가 일부 법관 동향을 수집한 정황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에 청와대가 개입하려 한 정황이 공개됐다. 이어진 3차 조사에서는 사안의 핵심이 내부 블랙리스트에서 강제징용, 통상임금, 키코, KTX 승무원 정리해고 판결 등에 대한 ‘재판거래’ 의혹으로 전환됐다. 특히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전교조 시국선언 등 상당수 사건은 보수 정권 아래 반대 세력이 부당한 판결을 받았을 수 있다는 의심을 샀다.
법원 내 세력 다툼 정도에 그쳤던 이슈는 박근혜 정부의 정치·사회적 스캔들로 단숨에 확대됐다. 김 대법원장은 이후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공표했고 행정처를 폐지하겠다는 개혁안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9월 사법부 70주년 행사에서 “의혹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소환은 달라진 사법부 성향과 구도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라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평가다.
다만 아직 사법부 주축 세력 교체가 과도기에 있는 만큼 신구 세력 간 법원 내 갈등이 양 전 대법원장 수사 후 더 증폭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검찰 수사 협조, 법관 탄핵, 특별재판부 등 논란마다 불거진 법원 내 갈등은 사법부 수뇌부로도 번져 최근 안철상 전 법원행정처장이 돌연 사임한 것을 비롯해 최인석 전 울산지방법원장이 사표를 내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입장 발표를 피해 뒤늦게 출근하면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 VS 법원’ 갈등도 극에 달해…물러설 수 없는 일전=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검찰은 ‘전국 특수수사 1번지’ 서울중앙지검에 사건을 맡겼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 서울중앙지검 4개 특수부는 물론 수십명의 파견 검사까지 투입하는 등 ‘매머드급’ 수사 인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검찰이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 등 사법농단 의혹 연루자들에 대해 연이어 압수·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번번이 법원의 문턱을 넘지 못한 탓이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것은 이번 의혹의 ‘키맨’으로 불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검찰과 법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영장 기각에 검찰은 ‘기각을 위한 기각’ ‘반헌법적 중범죄들의 전모 규명을 막는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법원도 “영장 기각 사유를 공개하는 등 행위가 부적절하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다른 수사에서도 사사건건 부딪치던 양측이 이번 수사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갈등의 골이 한층 깊어진 셈이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의 이른바 ‘검찰 포토라인 패싱’도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쌓인 양측의 갈등이 일거에 표출된 장면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게다가 양 전 대법원장은 자신이 몸담았던 대법원 정문 앞에서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소명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검찰이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수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무언의 시위로 풀이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각종 영장 청구·발부 과정에서 검찰과 법원이 대립각을 세웠던 터라 앞으로 다른 수사 과정에서 양측이 다시 충돌하면서 상호 협력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