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親勞 리스크에 붕괴되는 조선 생태계]일손 부족에 신입-2년차 월급역전..."일감 늘어도 비용 고민"

중소 기자재 협력업체 연쇄부도로 부품 조달 큰 어려움

조선 불황 장기화에 인력도 대거 이탈...5년새 1만명 뚝

최저임금 인상으로 상위직도 불만...인건비 부담에 한숨

조선 기자재 업체들이 몰려 있는 부산시 강서구 녹산 산업단지에 매물로 나온 공장 정보를 알리는 전단지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서울경제DB조선 기자재 업체들이 몰려 있는 부산시 강서구 녹산 산업단지에 매물로 나온 공장 정보를 알리는 전단지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서울경제DB



한 대형 조선사의 재무담당 임원은 최근 “담을 넘어서라도 협력업체 창고에 있는 기자재를 가져와 쓰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에게 도둑질을 시킨 셈이다. 하지만 속내를 듣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딱하다. 해당 기자재 협력업체가 기업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해 생산과 업무가 사실상 중단되고 자산은 동결된 상황에서 부품을 못 받으면 선주 측 인도 날짜를 못 지킬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선주에게 선박 인도를 제때 하지 못하면 조선업체는 하루에 수십억원씩 지체상금(계약 기간 내 계약상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때 지불하는 금액)을 내야 한다. 새로 부품을 발주할 시간도 없었다. 아직 미완인 기자재를 훔쳐서라도 가져와 조선소 내에서 완성시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직원의 설명에 그는 고민 끝에 “내가 책임질 테니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한국 조선산업의 본산인 부산·울산·경남의 조선 기자재 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 들어서는 자금 사정이 위험하다는 경고등이 켜진 협력업체의 기자재는 완성되기 전에 미리 조선소로 가져와 직접 작업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협력업체들의 부도로 부품 조달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조선사들은 거래업체들의 자금·운영 상황을 계속 관리하고 있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경쟁력은 있는데 자금 사정이 안 좋은 경우에는 대금을 선지급하거나 납품 단가를 올려줄 때도 있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토로하며 “업체들이 망해나가고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우량 협력업체 유지 관리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조선 기자재 업체들의 연쇄부도에 따른 조선 서플라이체인 붕괴는 기본적으로 수년간 지속 된 조선업 불황의 여파 탓이다. 긴 불황에 중소 기자재 업체들이 차례로 전업과 폐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황을 버틴 기자재 업체들은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조선 수주가 회복되며 이제 겨우 숨통을 틔우나 했지만 주 52시간 근로제와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정부 정책이 다시 목줄을 죄기 시작했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조선 기자재 인력은 지난 2012년 6만3,553명에서 2017년 5만3,375명으로 5년 사이 1만명가량 줄었다. 부산 지역의 한 기자재 업체 대표는 “조선업 불황으로 떠난 인력들이 되돌아오지 않으면서 기자재 업체들이 사람을 뽑고 싶어도 뽑을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며 “일감이 늘어나도 주 52시간 근로제로 인해 일손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은 지방에 위치한 조선 기자재 업체들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의 임금 수준이 더 낮아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향을 더 크게 받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기자재 업체들의 인건비가 높아지고 이는 결국 조선업체들에는 밑에서부터 오는 비용압박이 되고 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최저임금을 받는 직원뿐 아니라 상위 직급들까지 상승압력이 커졌다. 경남 지역의 한 협력업체 대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들어온 직원들은 최저임금을 받는데 이들이 올해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1년 선배들보다 월급이 더 높아졌다”며 “우리 회사는 임금 인상 시기인 4월까지는 이런 월급 역전 현상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상위 직급의 불만이 상당해 4월 기존 임금 인상 폭보다 더 올려줘야 될 것 같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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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은 다른 제조업보다 노동집약적 특성이 강하다. 선주 측으로부터 맞춤형 주문을 받아 그에 맞춰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 사람이 직접 후판을 자르고 용접하며 배를 만들어야 한다. 그만큼 대규모 고용이 일어나고 국가·지역 경제 기여도 크다. 업계에서는 “그런 산업이어서 현 정부 노동정책의 타격이 더 크다”고 입을 모은다. 한 협력업체 대표는 “월급을 많이 주기 싫은 사장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현실에 맞게 주는 것인데 임금 인상 폭이 너무 커 부담이 심하다”고 말했다.

다른 협력업체 임원도 “수주량은 1위를 탈환했지만 구조를 뜯어보면 이익을 내기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최저임금 인상이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했다. 후판과 형강 등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올랐고 중국 인건비 상승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자재부품 가격도 급등했는데 임금 상승 부담까지 짊어졌다는 설명이다.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조선업이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서플라이체인은 무너지고 있어 연착륙할 수 있는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8일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의 기업회생절차 신청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지역 기자재 업체들의 근심은 더 커졌다. 부산·울산·경남지역 기자재 업체들이 갖고 있는 수빅조선소 매출채권은 약 700억원에 달한다. 250여곳의 수빅조선소 협력업체들 중 ‘부울경’ 지역 업체들은 150곳 정도다. 한진중공업이 피해 접수를 받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한진중공업은 “일단 피해 접수를 받은 뒤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이다.
hspark@sedaily.com

박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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