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시각] 대통령의 연설문

김능현 경제부 차장

김능현 차장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인 페기 누난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퓌레’에 비유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연설문에 대해 “관료주의라는 고기를 가는 기계에 넣어 부드럽지만 밍밍하고 식감도 없는 퓌레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푸념했다. 육류나 채소류를 삶아 체로 걸러 묽게 만든 퓌레처럼 이런저런 표현들이 덕지덕지 녹아 들어가 고심 끝에 만들어낸 주옥같은 표현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누난은 백악관 참모와 정부기관 관료 20~50명이 연설문 원고를 돌려보며 수정 의견을 내놓는 과정에서 자신이 쓴 섬세한 표현들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느라 안간힘을 썼다고도 했다.

글발에 승부를 거는 글쟁이의 하소연이지만 그만큼 대통령의 연설문은 수많은 참모의 강독을 거치며 수정에 수정을 거친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역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연설문에서는 단순히 대통령의 철학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측근과 관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연설문에서 누난의 ‘퓌레’가 연상된다면 과장일까. 대통령의 연설문은 성공적인 평창올림픽 개최와 수출 6,000억달러 및 국민소득 3만달러 개막 등 희망적인 언어로 시작됐다. 그러고는 지난 한 해의 성과가 줄줄이 나열됐다. “지난해 전반적인 가계 실질소득이 늘었고 혁신성장과 공정경제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했고 “지난해 사상 최대인 3조4,000억원의 벤처 투자가 이뤄지고 신설 법인 수도 역대 최고인 10만개를 넘어섰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적시했다.


물론 아쉬웠던 점도 일부 언급했다. “고용지표가 양적인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했고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주력 제조업의 부진도 계속되고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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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연설문을 보면 지난 한 해의 성과와 아쉬운 점을 한데 섞어 묽게 만들려는 측근들과 청와대 파견 관료들의 노력이 여실히 엿보인다. 대통령은 “현 경제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연설문에서 언급했지만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표들을 성과로 포장해 줄줄이 나열하면서 오히려 청와대의 상황 인식이 안일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연초 발표되는 지표들은 이런 비판에 힘을 더해준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과 투자가 곤두박질치고 있고 지난해 성장률은 2.67%를 기록해 사실상 2%대 중반으로 고꾸라졌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고음’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참모들로는 선거 없는 올해 획기적인 정책 전환을 꾀하기 어렵다. 청와대 내에 ‘레드 팀’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김능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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