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긴 해가 없었다. 수구문(광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육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나오는 광해 5년(1613년) 10월25일의 기록이다.
광해군은 ‘돌림병 처방을 담은 책을 편찬해야 한다’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날 “허준 등에게 속히 편찬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23일 오전10시까지 35명의 확진 환자가 발생한 홍역(紅疫)에 관한 이야기다. 당홍역은 성홍열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홍역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홍역은 한자 그대로 붉은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것을 빗대 표현했다. 당시는 역귀(疫鬼·역병을 일으킨다는 귀신)가 있다고 봐 광해군은 “여단(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 지내던 제단)에 다시 기도해 빌라”고 지시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역질’ 463건
홍역부터 마마 등 감염병 몸살
한국전쟁 전후까지 공포 여전
세종 1년(1419년) 5월1일 ‘세종실록’에도 “각 도에 역질(疫疾·전염병)이 성행한다 하니 구료(救療·치료)에 힘쓰지 않으면 요사(夭死·요절)하게 될 것이다. 심히 안타깝게 여겨 여러 약을 감사들에게 하사하니 수령들은 구료에 힘쓰라”는 기록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역질’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총 463건이 나오는데 홍역은 물론 마마(天然痘·천연두)나 염병(染病·장티푸스), 콜레라(虎列刺·호열자) 등 전염병(감염병)을 일컫는다. 세종도 당시 약을 지방에 내려보내는가 하면 ‘향약집성방’ 등을 펴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나 백성들이 무더기로 숨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전북 부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허선영(80·고창 흥덕)씨는 “한국전쟁 전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염병 등 괴질이 발생하면 한 집 걸러 한두 명씩 숨질 정도로 전염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당시에는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는 천연두를 ‘큰손님’, 홍역을 ‘작은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홍역 백신 도입 뒤 감염자 줄어
2006·2014년 ‘퇴치’ 공인 불구
잇따라 환자 발생하며 근절 안돼
홍역에 걸리면 흔히 38도 이상의 열이 나고 피부가 붉어지며 염증과 부종이 동반된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홍역은 기관지염·기관지폐렴 등(4%), 급성 중이염(2.5%), 뇌염(0.1~0.2%)을 비롯해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한다. 질병관리본부 국가건강정보 포털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백신이 보급된 뒤에도 연 3,00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홍역에 걸려 연 74만5,000여명이 숨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어린이 희생자가 50만여명이다. 우리나라는 1965년 홍역 백신이 도입된 지 한참 뒤인 2000년과 2001년에도 각각 3만2,647명, 2만3,060명이 감염됐다. 2006년과 2014년 각각 정부와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사무국이 홍역 퇴치를 공인했으나 그 뒤에도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홍역 외에 장티푸스나 콜레라·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수두 등 많은 감염병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전파력이 강해 ‘법정 전수감시 대상’으로 분류해놓은 것만도 59종에 달한다. 여기에 결핵과 에이즈는 빠져 있다. 1980년대까지는 결핵예방주사(BCG)를 맞을 때 주사기가 부족해 끝을 알코올램프 불로 소독해 재활용하는 바람에 ‘불주사’로 불렸다. 당시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이 줄지어 한 주삿바늘로 예방접종을 받았다. 지금도 40대 이상은 어깨 등에 큰 불주사 자국이 남아 있다. 송경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제협력국장은 “아직도 북한에서는 결핵 환자가 13만여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매우 많아 남북 간 과학기술 교류가 재개될 경우 결핵 퇴치가 우선협력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감염병의 원인은 세균과 바이러스로 나뉘는데 홍역은 바이러스로 전파된다. 단백질인 바이러스(세균의 0.1~1% 크기)는 세포를 숙주 삼아 번식해 전염성이 더 강하며 세균은 독립된 세포로 이뤄져 공기나 생명체에 홀로 증식한다. 천연두·메르스·사스·에볼라·지카 등은 바이러스, 장티푸스·콜레라·흑사병·결핵·폐렴·한센병 등은 세균이 원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인간을 숙주로 삼는 홍역 바이러스는 호흡기 분비물이나 오염된 물건을 통해 감염되는데 감수성 있는 사람은 90% 이상 감염된다”며 “다만 홍역 환자와 접촉했어도 72시간 내 예방접종을 하고 안정을 취하며 물을 충분히 마시면 발병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