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힘썼던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할머니의 빈소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 활동가, 시민, 대통령 등 고인을 추모하는 주요 인사와 시민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부축을 받아 영정 앞에서 홀로 추모의 시간을 가진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이렇게 빨리 가시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1993년 할머니의 유엔 공개 증언으로 감춰진 역사가 우리 곁으로 왔다”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잊지 않고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도리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빈소 조객록에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십시오”라고 적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하루간 일정을 비우고 상주로서 빈소를 지켰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실제 주인공인 이용수 할머니와 나문희 배우도 빈소를 찾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 소녀였던 1940년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이후 중국·홍콩·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다니며 8년간 성노예로 살았다. 스물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온 소녀는 할머니가 된 후 피해를 고백했다. 1992년 3월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과 피해자의 존재를 처음 폭로한 김 할머니는 이듬해에는 유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증언했다. 국제사회에 일본군의 만행이 처음으로 알려진 순간이었다.
김 할머니는 67세의 나이에 인권운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입은 전쟁 피해 경험을 반전·반성폭력 활동으로 승화시켰다. 유엔인권이사회·미국·영국·일본 등 매년 수차례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뛰었다. 전 재산을 남을 위해 쓴 것도 여러 번이다. 콩고·우간다 등 무력분쟁 지역 아이와 여성들, 재일 조선고 학생들, 일본 동북부 지진 피해자 등 수많은 전쟁·재난 피해자들이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
김 할머니의 활동은 병마의 사투 속에서도 계속됐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할머니는 본인이 암인 것을 아시면서도 2015년 한일합의가 피해자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다니며 수술을 미루고 또 미루셨다”고 전했다. 김 할머니는 2017년에는 분쟁지역·전시 성폭력 문제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김복동평화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윤 대표는 “김 할머니는 그간 2억원이 넘는 돈을 전시 피해자 방지 활동에 써왔고 당신 통장에는 160만원만 남겨놓고 편안하게 자유롭게 날아가셨다”고 말했다. 세계 각지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김 할머니를 ‘영웅’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 김 할머니의 유언은 일본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김 할머니는 생명의 빛이 꺼져가던 28일 저녁 돌연 두 눈을 부릅뜨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달라. 나를 대신해 끝까지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을 지원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윤 대표는 “김 할머니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일본 정부를 규탄하셨다”고 전했다.
시민과 학생들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은평구 선정국제관광고 동아리 ‘GRG(소녀가 소녀를 기억한다)’ 소속 정윤지(18)양은 조문 후 기자와 만나 “일본의 사죄를 못 받고 돌아가셔서 마음이 무겁고 그만큼 저희가 열심히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오지현·윤홍우기자 ohj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