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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말의 세계사] 문명, 馬力에 끌리다

■피타 켈레크나 지음, 글항아리 펴냄

교역 발전 기폭제 역할했지만

기마 군국주의로 갈등 부르기도

6,000년 이어온 인간·말 공생

'이중성' 키워드로 변천사 분석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오늘날 인류 문명을 있게 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사건으로 인지 혁명과 농업 혁명, 그리고 과학 혁명을 꼽았다. 하라리에 따르면 사자나 공룡과 같은 동물에 비해 보잘것없이 연약한 존재였던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농업 혁명을 거치며 비약적인 규모의 성장을 이룬 인류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이제는 신(神)의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불멸의 삶’을 넘보기 시작했다.


미국 인류학자인 피타 켈레크나가 쓴 ‘말의 세계사’는 인간과 말(馬)의 공생 관계를 바탕으로 문명사의 흐름을 분석한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인류학·역사학·고고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제시한다. 책에 따르면 매우 지적인 존재임에도 육체적으로 약하고 몹시 느린 존재였던 인간은 약 6,000년 전 말을 사육함으로써 말의 속도와 힘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말의 사육은 오늘날 식량 경제의 기초를 이루는 동물 경작이 수천 년 동안 진행된 다음에야 시작됐는데 이를 기점으로 인류는 자급자족 체제에서 완벽히 탈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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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 무렵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기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사진제공=글항아리기원전 1,000년 무렵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기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사진제공=글항아리


책은 말의 힘, 즉 마력(馬力)이 인류에 가져온 변화를 ‘이중성’의 키워드로 풀어낸다. 먼저 기원전 4,000년 무렵 헝가리에서 중국 국경까지 6,400㎞ 넘게 펼쳐진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처음 사육된 말은 얼마 안 가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말을 타고 초원지대를 벗어난 기마병들은 정착 생활을 하는 제국의 군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이후 유럽 지중해와 아랍, 몽골 등 세계 곳곳에서 ‘기마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온 인류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221년 소용돌이치는 전국시대의 난세에 진시황이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인 진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전차와 기병의 효과적인 활용 덕분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5세기 중반에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말을 타고 서쪽으로 내달리며 유럽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말을 보유한 문명’과 ‘말이 없는 문명’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졌다. 말이 없는 문명에 사는 인간 짐꾼은 고작해야 하루 20㎞ 남짓을 낑낑대며 움직일 뿐이었지만 칭기즈칸의 정예 전사들은 매일 400㎞씩 달릴 수 있었다.



이처럼 마력은 말 사육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파괴적인 정복 전쟁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거리 교역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기마병들의 광범위한 이동 경로는 결과적으로 문화 교류를 동반하면서 사상과 종교의 전파, 과학과 예술의 확산에 일조했다. 책은 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불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게 된 배경에는 기마술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날 지구촌의 65억 인구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모국어로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말하는 것 역시 기마의 팽창에 따른 결과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성실한 취재와 깊이 있는 통찰로 마력이 이끌어온 문명의 변천사를 조명한 끝에 이렇게 결론짓는다. “말의 힘은 인류에게 특별한 기동성을 부여했고 경이로운 문화적 성취를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말이 받아들여지면서 인간 갈등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강도가 크게 증가했다. 말에 걸터앉은 인간은 지적으로 뛰어나지만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 있는, 반은 신이고 반은 야수인 켄타우로스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두 발 동물과 가장 빠른 네 발 동물의 동반자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영어 원제(‘The horse in human history’)에 온전히 담겨 있다는 생각도 든다. 3만8,000원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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