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세상에 복합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상적이면서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한방’이 필요하다.” (AP통신)
인권탄압, 성·인종차별, 생활고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거리로 뛰쳐나오는 세계 각국의 시위대가 거리 곳곳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부터 태국의 ‘빨간 셔츠’까지 강렬한 색깔의 의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이른바 ‘컬러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강렬한 색과 통일된 의상은 어떤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난해 11월부터 12주째 프랑스 전역을 달구고 있는 노란 조끼 시위가 대표적인 예다. 이 시위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과 물가 상승에 반대한 시민들이 노란색 형광 조끼를 입고 시위에 참여한 데서 비롯됐는데, 애초에 시민들이 형광 조끼를 입은 것은 노란색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시민들이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상비품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긴급상황에 대비해 차량에 형광색 조끼를 비치해야 한다는 법에 따라 지난 2008년부터 모든 운전자가 노란 조끼를 보유했다. 가격도 6~7달러로 저렴하다. 이러한 이유로 노란 조끼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에린 번콤비 미국 프린스턴대 강사는 “역사적으로 의상은 시민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서 “정치조직에 소속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성 정치에 반대하고 구조적 변화를 주장하기 위해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 방침 철회 이후에도 노란 조끼 시위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정치세력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번에는 붉은 스카프와 파란 조끼가 대항마로 나섰다. 시민운동이 이념적 폭력시위로 둔갑하고 있다고 본 시민 1만여명이 비폭력 민주주의를 외치며 노란 조끼를 입은 시위대에 맞서 파리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노년·중년층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시위대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구성하는 색이기도 한 파란색과 빨간색을 앞세워 ‘평화적 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 국기에서 파란색은 ‘자유’, 빨간색은 ‘박애’를 각각 상징한다.
오는 3월24일 군부 쿠데타 이후 5년 만에 총선을 치르는 태국에서도 빨강과 노랑 물결이 부딪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빨간 셔츠를, 탁신 전 총리의 반대파는 노란 셔츠를 입고 색깔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가 유럽·중동·북미로 번져나가면서 노란색이 반정부시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하지만 입헌군주제를 따르는 태국에서는 의미가 다르다. 억만장자 기업인 출신의 탁신 전 총리가 이끄는 타이락타이당이 2001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하자 민주당 지지자들은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셔츠를 입고 거리시위를 벌였다. 2005년에는 노란 셔츠를 입은 반탁신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왕실에 대한 충성을 외치며 정부청사를 점거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노란 셔츠 시위가 계속되자 친탁신파는 빨간 셔츠를 입고 거리에서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친탁신 시민단체인 독재저항민주전선연합(UDD)이 반탁신파와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한 빨간색 셔츠를 갖춰 입은 시위대는 2006년 총선이 무효로 되고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실각하자 총선 재실시를 주장했다. 빨간 셔츠 진영은 지방에서 올라온 도시 빈민들로 채워진 반면 노란 셔츠 진영에는 도시 중산층이 포진해 이번 색깔 전쟁은 계급 간 대결로도 해석된다.
홍콩에서도 2014년 9월 중국 정부의 정치 간섭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노란 물결이 79일간 몰아쳤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최대 민주화시위로 평가받은 홍콩의 ‘노란 우산 시위’는 행정장관의 완전직선제 도입을 요구하는 홍콩 젊은이들이 폭력진압을 일삼는 경찰에 비폭력으로 맞서겠다며 평소 들고 다니던 피서용 우산을 펼쳤든 데서 시작돼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노란색은 30년 전인 1980년대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반독재시위대가 노랑을 상징색으로 삼은 데서 착안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흰색은 인권유린·인종차별에 항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색깔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반이민정책을 밀어붙였던 지난해 이민자들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흰옷을 입었다. 대선이 있었던 2016년에는 여성의 참정권 확대를 주장한 시위대도 흰옷을 착용했다. 미 타임지는 반이민시위 단체를 인용해 “흰색은 평화와 통합을 의미한다”면서 “(정부에) 강력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 흰옷을 입는다”고 설명했다.
주황색도 반정부시위대가 종종 채택하는 색깔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주황이 총기사용 반대를 의미하는 색이 됐다. 2015년 당시 15세였던 흑인 여고생 하디야 펜들턴이 폭력조직원이 쏜 오발탄에 목숨을 잃은 뒤 펜들턴의 친구들이 그를 추모하는 색으로 주황색을 선택한 것이 계기였다. 지난해 총기사용 반대를 외친 시위대는 CNN방송에 “사냥꾼들이 숲에서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주황색을 입는다. 이제 우리가 보이는가”라며 총기사용을 옹호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이밖에 성차별 반대를 외치는 여성 인권보호시위에서는 분홍색이나 녹색 의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 여성들은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의 여성차별 발언에 항거하며 분홍 모자 시위를 벌였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지난해 파란 두건을 두르고 낙태 반대를 외친 보수진영에 대항해 녹색 두건을 두르고 낙태 찬성운동을 진행했다. 검은색은 특정 인종을 가리키고 이슬람국가(IS) 복면 등을 떠올리게 해 잘 쓰이지 않지만, 2016년 폴란드에서는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 생식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검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