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시그널]독점 우려에…의료 빅데이터 싹 자른 정부

공정위 기업결합 심사기준 개정

매출 대신 인수가 기준 신고 확대

혁신산업 독점 방지 명분이라지만

독일 등 일부국가 외엔 전례 없어

일각선 "벤처투자 축소 불보듯"

지난 2월 국내 최초로 의료 빅데이터 기업인 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가 설립됐다. 현대중공업지주와 서울아산병원, 카카오인베스트먼트가 손잡은 합작사다. 환자정보를 익명화하고 시각물로 만들어 병원이 연구나 서비스 고도화, 경영 개선에 활용하게 하는 솔루션을 개발할 계획이다. 야심이 넘쳤지만 앞으로의 사업 확장성을 놓고서는 설왕설래다. 싹이 채 나기도 전에 벌써 규제의 사슬이 덮치고 있는 탓이다.




당장 보건복지부는 환자정보가 새나갈 경우 즉각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추가 인수합병(M&A)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이번에 합작사 설립을 승인했지만 국내 의료 빅데이터 사업을 할 수 있는 대형 병원이 6~7개로 많지 않은 상황에서 플랫폼(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은 하나만 등장한 것”이라면서 “하나의 플랫폼이 추가 M&A 등을 통해 의료 빅데이터 시장을 독점한다면 혁신경쟁이 제한되므로 규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에 투자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벤처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4일 “명분은 독점 차단이지만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면서 “한쪽에서는 대기업의 벤처투자를 활성화하겠다면서 다른 편에서는 통제하는 식인데 개발에 성공한 스타트업계의 활발한 M&A가 뒷받침될 때 생태계는 더욱 확장된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해외보다 소극적인 벤처 M&A가 더욱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꼴인데 과연 시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었는지, 의아스럽다”고 지적했다.

황교안(오른쪽) 자유한국당 대표가 4일 국회 당 대표실에서 예방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황교안(오른쪽) 자유한국당 대표가 4일 국회 당 대표실에서 예방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정위가 어떤 결정을 내렸기에 투자 업계가 이렇게 반발하는 것일까.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전면개정 등을 통해 기업결합신고와 심사 기준을 바꾼다. 인수가액을 기업결합신고 기준에 추가하고 심사 시 연구개발(R&D)과 특허 수, 빅데이터 자산 인수로 인한 영향을 따지기로 했다. 공정위와 더불어민주당은 전면개정안을 국회 신속처리 대상에 올렸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이날 황교안 신임 자유한국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혁신성장을 실현하는 등 21세기 상황에 맞는 경제 입법 질서를 만들려고 한다”며 법 통과를 요청했다.


그동안 공정위는 기업결합심사 시 기업의 ‘현재’에 방점을 찍었지만 앞으로는 장래 발생할 수 있는 독과점 가능성에 주목한다. 공정위 고위관계자는 “적자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할 때는 새로운 시장을 먼저 알아보고 선점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독과점이나 혁신 제한을 사전에 차단하지 않으면 사후 규제 비용이 더 커진다”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이에 따라 공정위는 피인수기업의 인수가액이 일정 이상이면 기업결합 의무신고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현재는 매출이나 자산이 인수기업 3,000억원, 피인수기업 300억원 이상이면서 일정 이상 지분을 인수하면 신고해야 한다. 앞으로는 매출과 자산이 이보다 적어도 인수가액이 일정 이상이면 신고 대상에 추가된다. 공정위 안팎에서는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3,000억원보다 높은 금액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가에는 당장 지불하는 대금만 적용하지 않는다. 혁신산업 M&A는 인수 후 일정 목표를 달성하면 추가로 인수가를 지불하는 ‘언아웃(earn out)’ 계약이 흔한데 이때 지급하는 추가 대금도 신고 대상 인수가로 고려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고 시 심사에도 피인수기업의 R&D 역량과 빅데이터의 가치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바이오 기업 A가 B의 신약 후보물질을 유통·판매하기 위해 B를 인수하면 경쟁기업 인수로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기업 C가 빅데이터 자산을 갖고 있는 D기업을 인수하면 이 빅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가 해당 업종에서 얼마나 경쟁을 제한하는지 점검하게 된다.

해외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가장 먼저 혁신산업 M&A 규제를 도입했으며 공정위도 이들 국가의 법 제도를 참고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매출액과 자산이 적어도 인수가액이 각각 2억유로(약 2,500억원)와 4억유로(약 5,000억원) 이상이면 신고하도록 했다. 다만 그 밖의 국가에서는 혁신산업 M&A 규제가 없고 독일 등도 신고 기준만 강화했을 뿐 심사 기준은 마련하지 않았다.

관련 업계는 벤처 M&A가 위축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내 벤처기업 관계자는 “공정위가 한쪽에서는 대기업의 벤처투자를 활성화하겠다면서 다른 편에서는 통제하겠다는 발상”이라면서 “벤처 창업자의 M&A 성공 사례는 더욱 나오기 어렵게 됐다”고 비판했다. 한 대형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국내 투자 업계는 해외보다 기업의 장래성을 보는 시야가 짧다”면서 “벤처 업계는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쟁이 치열한데 정부마저 혁신산업 시장을 국내로 좁혀 보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임세원·양지윤기자 why@sedaily.com

임세원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