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겸손·경청의 리더십…'글로벌 두산' 다진 침묵의 거인

재계 "평생 자신을 낮춘 리더"

사업방향 결정땐 직원의견 듣고

'글로벌 두산' 다진 침묵의 거인

6·25 당시엔 해군 자원 입대

'노블레스 오블리주' 몸소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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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겸손의 리더십으로 ‘글로벌 두산’의 초석을 다진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다.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 경동고와 미국 워싱턴대에서 수학한 고인은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재계에서는 박 명예회장을 ‘평생 자신을 낮춘 거인’으로 존경했다. 청년 시절부터 그는 자신을 낮췄다.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6·25 전쟁 당시 해군에 자원 입대해 목숨을 걸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통신병으로 암호취급 부서에 배치된 그는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함정을 타고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품 때문에 공적이 알려지지 않아 오히려 남들보다 늦게 인정을 받았다. 2014년 5월에야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박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을 맡은 이후에도 부하 직원 등 상대방의 말이 끝난 후에야 입을 열고 사업의 방향을 결정했던 ‘경청의 리더’였다. 재계에서 유명할 정도로 과묵한 성품이었던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내 위치에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은 약속이 됩니다. 그러니 말을 줄이고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죠.”

두산 직원들은 박 명예회장에 대해 “먼저 얘기하기보다는 다른 의견을 존중한 ‘침묵의 거인’이었다”고 회상한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에도 그는 항상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들었고 이후에야 자신의 뜻을 전하고 직원들과 토론했다.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68년 6월 한양식품 독산동 공장에서 코카콜라의 첫 국내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제공=두산그룹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68년 6월 한양식품 독산동 공장에서 코카콜라의 첫 국내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제공=두산그룹


고인의 이력을 돌아보면 자연스러운 경영 스타일이었다. 재벌그룹의 후계자였지만 출발부터 낮은 곳이었다. 1960년 4월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 공채 6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의 밑에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고,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이었다.


3년간의 은행 생활 이후 들어온 두산그룹에서도 시작은 동양맥주 말단 사원이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그는 경영자로 성장한 이후에도 인화와 인재를 강조했다. 운전기사가 아파서 결근한 날이면 직접 차를 몰고 회사로 출근해 주차를 마친 뒤 사무실로 갈 정도로 소탈했고, 한 운전기사와 40여 년을 함께할 정도로 지위 고하를 떠나 인화를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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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노력하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합니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박 명예회장의 말이다.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96년 5월 새 그룹 이미지 선포식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두산그룹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96년 5월 새 그룹 이미지 선포식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두산그룹


그는 회사의 운명을 책임질 경영자로서 혁신과 미래에 대한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룹 회장으로 일할 때 그는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뒀던 1995년에는 지금의 ‘글로벌 두산’을 있게 한 산업재 기업으로의 사업 재편을 주도했다.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고 유사 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로 계열사 수를 33개에서 20개로 줄였다. 또 당시 두산의 대표 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박 명예회장의 그룹 체질 개선에 힘입어 두산그룹은 2000년대 들어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미국 밥캣(현 두산밥캣) 등을 인수하며 중공업 분야의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두산그룹 출신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며 “겸손하면서도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에 밝아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박 명예회장은 ‘수분가화(守分家和)’를 가훈으로 삼았다.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면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라’는 뜻과 ‘조금씩 양보하고 참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1996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고(故) 이응숙 여사의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간병했을 정도로 가족에 헌신적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 박혜원 두산매거진 부회장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다. 장례는 가족장이며 발인과 영결식은 7일,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박한신 기자 hspark@sedaily.com

박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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