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땅,물,풀….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은 흙에서 컸고 흙의 정서가 온몸에 밴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림에 특출난 재주가 있어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으나 막상 졸업할 즈음 되니 “그림만 그리며 살기에는 너무나 엄혹한 세상”이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 허망한 짓이라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땅’과 ‘흙’을 다시 보게 됐다.
“일제시대, 전쟁, 이데올로기 갈등, 독재를 겪은 이 땅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땅이 곧 주인이고 땅이 곧 결과물이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곧 나이고,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땅에 기록돼 있을 것이다.”
흙의 생명력을 예찬해 땅의 사회학과 정치학으로 끌어올린 미술가 임옥상(69)의 이야기다. 광화문 촛불집회를 담은 대형 그림 ‘광장에, 서’가 지난 2017년 말 청와대 본관에 걸린 것을 계기로 더욱 유명세를 탄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글날에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세종대왕의 능인 경기도 여주 영릉 참배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곁을 나란히 걷기도 했다.
정치적 주목과는 상관없이, 그는 화가다. 작가 임옥상의 개인전 ‘흙(Heurk)’ 전이 홍콩 센트럴의 서울옥션플러스(이하 SA+)에서 16일까지 열린다. SA+는 서울옥션 홍콩법인이 운영하는 상설전시장이며 아시아 현대미술의 거점이 된 홍콩에서 예술특화 건물로 유명한 H퀸즈 빌딩에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이번 홍콩 전시에 흙을 주제로 흙과 먹으로 작업한 최근작들을 공개했다. 전시 제목도 ‘흙’이라는 한국어와 이를 영어로 표기해 적었다. 사실 흙은 반세기에 이르는 임옥상 작품세계의 주축이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땅을 위한 내 모든 행동이 곧 그림”이라며 웅덩이를 파고, 산에 선을 긋고, 땅에 불을 질러보기도 했다. 땅을 물감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틀을 떠 내는 종이부조 작업으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땅에 대한 그의 행동이 때로는 권력에 맞서는 것으로 읽혔고 민중과 소시민의 삶을 땅과 같은 낮은 눈높이에서 바라본 그의 작품이 불온한 그림으로 핍박받기도 했다.
“흙을 통해서 흙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마침내 흙 그 자체가 작품이 되게 하는 기법을 찾아냈습니다. 접착제도 화학재료를 배제해 흙,물,먹, 풀 등 유기적인 재료로만 작업했어요. 흙의 생명력을 통해 우리를 다시 보자는 뜻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