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성생활에 꼭 필요한 ‘콘돔’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두 글자 그대로 입에 올리길 꺼려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콘돔이 초성으로 불리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교실에서는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콘돔의 구체적인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경우는 드물다. 누구보다도 콘돔에 다가가기 어려운 게 청소년들인데도 말이다. 미성년자가 콘돔을 구입하는 것을 ‘문란한 행위’로 여기는 부정적 인식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콘돔은 껌처럼 청소년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재화다. 여성가족부는 요철식 특수콘돔과 약물주입 콘돔만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이슈화하며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외친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 ‘이브(EVE)’를 운영하는 박진아(27·사진) 인스팅터스 공동대표를 만났다. 이브는 ‘피임’이라는 1차적 안전성뿐만 아니라 섹슈얼 헬스케어용품의 성분적인 안전성까지 추구한다. 콘돔·젤·생리컵 등 이브의 모든 제품은 유해화학물질을 배제한다. 동물실험을 반대하며 동물성 원료도 사용하지 않는 윤리적 제품이다.
◇“콘돔도 ‘헬스케어용품’이랍니다”=이브는 지난 2017년 청소년을 위한 ‘콘돔 자판기’를 길가에 설치하며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청소년의 피임권을 보장하기 위해 단돈 ‘100원’을 투입하면 콘돔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지금도 온라인으로 신청하는 청소년들에게 콘돔 2종을 무료로 보내준다. 오지일수록 신청률이 높다고 한다. 그는 “지역 공동체가 좁은 곳에선 약국 주인이 아빠의 친구인 경우가 있을 정도로 콘돔을 구하기 쉽지 않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면서 “이처럼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들에게 피임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금도 캠페인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이브를 앞세워 사회적 기업 ‘인스팅터스’를 설립한 것은 지난 2015년. 그가 이브를 선보이게 된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필요에서 비롯됐다. 박 대표는 “성생활을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서 내 몸에 닿는 것들의 성분이 내가 바라는 만큼 건강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며 “내가 그런 불안이나 불편을 겪고 있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사업화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콘돔이 자극적인 성인용품으로만 인식되는 현실도 그를 움직이게 했다. 박 대표는 “기존 콘돔은 얇다거나 기능이 추가됐다는 식의 자극적인 어필을 할 뿐 건강을 콘셉트로 한 ‘헬스케어’로 소구되지 않았다”면서 “문화와 병행하면서 성인용품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여성’을 상징하는 ‘이브’를 통해 성인용품이 성인남성만을 위한 제품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는“콘돔은 나이나 성별에 구분없이?안전한 성관계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면서 “여성의 생식기는 점막으로 이뤄져 있어 흡수력이 높기 때문에 안전한 콘돔은 특히 여성에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제품 디자인에서부터 콘돔의 접근성을 높였다. 빨갛거나 반짝거려 집어들기조차 어려운 제품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품’처럼 흰 바탕에 깔끔한 디자인을 입혔다. 그는 “성인용품이 단순히 민망한 제품이 아니라 화장품이나 먹거리처럼 ‘문화’와 ‘건강’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보된 ‘성(性)’ 의식 위한 한 걸음=최근 들어 주변에서 ‘성(性)’에 대해 자유로워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성인용품 전문점이 그 예다. 이 같은 성인용품 전문점에 대해 박 대표는 “성을 어렵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성에 내재한 상호 존중성, 호혜성, 위생, 피임 등 중요한 가치들 보다는 단순히 재밌고 자극적인 메시지만 전달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브 제품을 마케팅 할 때도 자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유리했을지도 모르지만 성을 ‘건강’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자는 방향성과 달랐다”면서 “성이라는 이슈를 음지에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방점을 두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문화가 퍼진다면 업계도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올해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동물실험을 거부하는 방향성에 맞춰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제품을 검증할 수 있는 ‘대체 실험’을 이슈화시킬 계획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는 서구보다 대체실험에 대한 인지도가 낮고 인정해주는 폭이 좁다”면서 “동물실험을 반드시 해야 하는 분야는 없다는 등의 문제 제기를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콘돔·젤·세정제·생리팬티·생리컵에 이어 임신보조제 론칭도 준비하고 있다. 임신보조제는 경제적·신체적 부담이 따르는 인공시술 전 임신 가능성을 높여주는 제품이다. 생리 팬티와 생리컵과 같은 대안월경용품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기 위한 행사로 ‘월경 마라톤’도 기획하고 있다. 그는 “여성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마라톤에 참가해 월경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제약되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