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7년 3월18일 오전8시50분. 영국 남서부 해역에서 ‘토리 캐니언(Torry Canyon)호’에 구멍이 뚫렸다. 목적지 밀퍼드헤이번항을 목전에 둔 좌초였다. ‘선박 한 척이 실리제도에서 난파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지역주민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좌초 지점이 수많은 암초로 악명 높은 실리제도였기에 ‘또 사고가 났다’고 여겼다. 1707년에는 영국 해군의 전함 5척이 침몰하고 사령관을 포함해 장병 1,647명이 실종·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지역이었다(영국이 경도법을 제정하고 경도위원회를 설치해 정확한 해상시계를 제작, 해난 사고를 크게 줄인 것도 실리 해군 참사의 영향이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곧 바뀌었다. 좌초한 선박이 대형 유조선이었기 때문이다. 길이 297m, 6만1,263톤급 유조선으로 1958년 건조 당시에는 세계 최대급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고 당일 적재물은 11만9,193톤의 원유. 승무원들의 노력에도 18개 저유고 가운데 14개에 구멍이 났다. 배 자체가 두 동강 난 상태에서 영국은 잔여기름을 태우겠다며 사고 발생 12일 뒤 해군의 버케니어 경폭격기 8대를 동원해 폭탄 6만2,000파운드, 5,200갤런의 휘발유, 로켓탄 11발과 수많은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폭격 후에도 기름때는 영국 남부 해안과 프랑스 노르망디 해역까지 번졌다. 사고 수습에만 당시 기준으로 2,400만달러 이상의 자금이 들었다. 사상 첫 대형 유조선 사고는 이해도 크게 엇갈렸다. 선적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선박의 소유권은 아메리칸유니언오일이 일부 지분을 갖고 있었으나 이탈리아인이었고 영국은 임차인이니 책임 공방도 길게 이어졌다. 결국 1차 책임이 자동조향장치를 잘못 설정한 승무원과 선장에게 있다고 정리하면서 각국은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공동 노력에 들어갔다. 그 결과물이 1969년부터 제정되기 시작한 ‘국제해양오염방지 협정’이다.
하지만 규정을 까다롭게 만들어도 사고는 연이어졌다. 1978년 아모코카디즈호와 1989년 액슨발데즈호가 좌초하며 프랑스와 알래스카의 바다를 크게 오염시켰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남해 시프린스호 사고와 태안 원유 유출 사고가 기억에 새롭다. 하나같이 대기업이 낀 사건이지만 사고 책임을 다 졌는지 의문이다. 평상시 이익은 기업이 가져가고 환경 파괴 같은 사고의 비용은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는 현상을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고 비꼬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